그리스도인과 평화와 전쟁 (23.01.19)

인류는 전쟁과 무관하게 살아 온 적이 거의 없다. 전쟁과 전쟁의 위협과 공포는 늘 우리 곁에 있어왔다. 코로나 19와의 전쟁과 더불어 러시아의 무단 침략으로 인한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류는 경제, 사회문화적으로 어려움에 처해있다. 동구권과 공산권의 몰락으로 변화된 세계질서가 러시아와 중국이 가까워진 신냉전 구도가 확장되고, 푸틴의 권력욕에 기인해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되었다. 해가 바뀌어도 이 지역의 전쟁과 그로 인한 피해는 커지고 국제 에너지 가격 상승, 곡물가격 상승과 국제 물류체계(SCM)의 붕괴와 난맥상으로 물가가 오르고 세계인의 삶은 어려워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크리스마스에 푸틴 대통령은 “러시아 정교회가 우크라이나에서 특별군사작전에 참여하는 우리 전사들을 지원하는 것을 우선시하고 있는데 이렇게 사심 없이 일하는 것은 진심 어린 존경을 받을 만하다"라고 찬사했다. 정교회의 키릴 총대주교는 "신자들이 이번 전쟁을 '러시아의 세계'를 보존하고 슬라브 땅을 모스크바의 영적·정치적 영도에 두기 위해 서방과 벌이는 성스러운 투쟁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는 사랑을 강조한 기독교가 침략전쟁을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란 질문을 하게 된다. 전쟁광 히틀러에 맞서 투쟁했던 본 회퍼(D. Bonhoeffer,1906~1945)의 평화지향 행동에 많은 사람이 지지를 표한다. 일본의 침략전쟁이 예수님의 사랑에 반함을 지적하며 반전의 입장을 고수해 개인적 어려움을 받았던 우치무라 간조(内村鑑三, 1861~1930)와 그 제자 다다오 (矢内原忠雄,1893~1961)의 행동은 많은 일본 그리스도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대하여 어떤 자세와 신앙적 태도를 가져야 할 것인가에 대한 중대한 질문에 자주 마주치게 된다. 전쟁은 기독교에 필수적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실현인가? 초대교회는 단연히 전쟁을 거부하는 입장을 견지했다. 교부 오리겐 (Origen)은 ‘그리스도인은 군인으로 나갈 수 없다’고 했고, 터툴리아누스 (Tertullianus)는 ‘그리스도인은 검 없이만 전쟁을 수행할 수 있다. 주님께서 검을 폐지하셨기 때문이다’라 했다. 알랙산드리아의 클레민트 (Clement of Alexandria)도 ‘검을 든 자는 그것을 내려놓아야 한다. 만약 믿는 자가 군인이 된다면 교회는 그를 거부해야 한다. 그가 하나님을 조롱했기 때문이다’ 라고 했다. 아우구스티누스 (Augustinus)가 기독교적 의로운 전쟁 이론을 제시했고, 아퀴나스 (T. Aquinas)가 그것을 수정, 보완했다. 대체로 그리스도인이 전쟁에 참여할 수 있다는 근거로는 1) 심각한 공적 악을 제거하기 위한 것 같이 이유가 정당한 것 (right cause), 2) 한 쪽의 악이 상당하게 큰 것이 확실한 것 (comparative justice), 3) 합법적인 권력을 가진 국가에 의해서 시작되는 경우 (competent authority), 4) 오직 불의하게 가해진 고통을 줄이기 위한 것, 즉 의도가 정당하며 (right intention),5) 성공할 가능성이 크고 (probability of success), 6) 모든 평화적인 수단이 다 효과가 없으며 (last resort), 7) 전쟁을 통해서 얻을 수 있는 효과가 전쟁으로 잃을 것보다 월등하게 초과하는 경우 (proportionality)라고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전쟁은 그것을 시작하는 자(집단)의 이익과 부합될 때만 발발했다. 십자군 원정은 초기의 선한 목적과 달리 교황 우르바누스 2세의 정치적 욕망과 참전 세력들의 다양한 욕망으로 변질되었고, 제국주의 시대 기독교 국가들은 아시아, 아프리카 및 남미를 침략하고 많은 원주민들을 학살하고 재화와 자원을 착취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리스도 복음전파란 양가죽을 쓴 늑대의 행동을 했고, 그 종국이 세계 1,2차 대전임을 역사는 웅변하고 있다.

한반도에도 진보정부 때는 남북화해, 협력과 교류 증진으로 평화와 통일의 길로 나가가다가도 보수 정부에 들어서면 남북대결과 비방의 길로 나아갔다. 윤석열 정부는 당선되자 북한의 버르장머리를 고쳐주겠다, 선제타격 가능하다, 북으로 드론을 보내라, 919군사합의파기 가능 등을 얘기하며 남북 긴장수위를 높이고 있고, 북한도 뒤지지 않고 미사일과 드론 등 도발을 쉬지 않고 하고 있다. 한반도 상황에서 우리 그리스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리스도인은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를 주장하고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의 사랑의 복음, 형제는 물론 원수까지 사랑하라는 지상명령에 한걸음씩 나아가도록 애쓰고 기도해야 한다. 한국기독교는 한반도의 상황에 대하여 하나님 주신 지혜로 현명하게 판단해야 할 것이며 다음 사안들을 참조사안으로 제안하고자 한다. 먼저, 1) 어떤 상황에도 평화를 지지하고 이를 위해 기도한다 2) 전쟁이전에 쌍방 이 요구하는 (정치, 경제, 사회적) 협상과 협력은 가능한가를 깊고 넓게 탐색하고 이를 추진한다 3) 쌍방의 합의가 어려우면 (UN, 미국,중국, 등 제3의) 중재자(안)는 없는가를 면밀하게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한다 4) 쌍방이 해결대안이 없고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부분적 충돌(국지전)로 해결 가능하도록 한다. 그리고 한반도의 지정학적 여건과 지경학적 상황을 고려하면 결코 전면전이 일어 날 수 없으며 남북의 누구도 이를 원치 않는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관된 주장이다.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사상가 키케로(Cicero, 106 BC~ BC 43)는 “부당한 평화가 정의로운 전쟁보다 낫다(An unjust peace is better than a just war.)”고 했다. 중국 춘추시대 전략가 손자(孫子)는 “싸우지 않고 적을 굴복시키는 게 최선 중의 최선( 싸우지 않고 굴복시키는 것이 최상; 不戰而屈人之兵, 善之善者也)”이라고 했다. 평화는 어떤 경우에도 목적뿐 아니라 수단 역시 평화적이어야 함을 강조한다. 이는 ‘목적은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칸트의 윤리학과도 상통한다. 우리는 처음부터 끝까지 평화를 주장하고 평화를 확장하고 평화정책을 지지하며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위해 기도해야 한다. 그럼에도 국제 정치, 군사적 현실에서는 예상하기 어려운 상황들이 존재하는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평화를 주장하며 아무런 준비를 않는 것도 현명한 전략일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국제 정치,군사적 상황에서의 죄수의 딜렘마(Prisoner's Dilemma)를 경험하게 될 수 있다. 죄수의 딜렘마의 상황에 대한 전략은 이미 ‘팃포탯(Tit For Tat)’이란 대안이 제시되어 있다. 우리가 선제공격이나 전쟁발발의 단초를 먼저 제공하지 않으나 상대가 먼저 전쟁을 발발할 때는 단호하고 강력하게 대응하는 만반의 준비를 해두는 것이다. 성경은 “그가 열방 사이에 판단하시며 많은 백성을 판결하시리니 무리가 그들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그들의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리라“고 말씀하신다.


그리스도인과 평화와 전쟁 / 김홍섭 인천대 명예교수, 평화통일연대 공동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