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미독립운동이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지에 세워진 교회와 전국의 교회를 조직화할 수 있었던 노회와 총회가 탄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민족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순수 복음 전도를 주장한 선교사들이나 지도자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마음까지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한국교회, 특별히 개신교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그 결과 교회는 백성들에게 놀라운 신뢰를 얻었고 민족 사회의 희망이 되었다. 이것이 그 시대, 복음의 공공성이었다.
한국교회는 그 기운으로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섰고 복음 전도는 무서운 기운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교회가 지금은 역사의 기운에 눌려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고 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회의를 넘어 교회가 사회적 공의를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는 무서운 비난에 직면해 있다.
교회가 공공성을 상실한다면 교회의 복음 증거는 허공을 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는 것은 역사적 기독교의 증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 개신교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복음의 공공성 회복이다. 한국교회가 존재하므로 한국 사회에 무슨 유익을 줄 것인가? 라고 묻는 한국 사회, 특별히 집단 지성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역사적 기독교가 준 값진 교훈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를 휩쓸고 있는 신비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 교훈으로부터의 회피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 안에 신비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역사의식과 접목되지 않은 신비는 신비주의요, 종교적 환각으로의 도피이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사회적, 역사적 공공성을 회복할 것인가?
못 다이룬 민족의 독립과, 진정한 해방을 주도하는 것이다.
한 민족, 두 국가로 양분되어 끝없는 갈등과 전쟁 기운을 내뿜고 있는 현실을 평화의 기운으로 진정시키고 마침내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는 일을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엘리트 중심의 통일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 성도가 함께하는 대중적 통일운동이 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운동은 독립운동보다 어렵고 긴요하다.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지 않으면 남과 북이 마침내 전쟁으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담함은 그 명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이요, 반역사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성서적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평화 세력은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을 짓밟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이 자기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항상 해왔던 일은 반역사요, 반평화요, 반민족이었다.
그들에겐 기득권 옹호보다 더 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 때 차지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민족 세력이 교묘하게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수가 아직은 기껏해야 30%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땅의 반민주, 반평화, 반민족 세력들이 이념이나 종교적 탈을 쓰고 있지만 저들의 본질은 기득권 옹호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해방 이후, 점점 부강해진 국력과 인간의 탐욕이 결합해서 기득권 세력이 너무 커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평화통일운동을 훼방하는 가장 큰 방해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기득권 세력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설득하면서 평화통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가야 한다.
전쟁 발발에 대한 무감각증은 거짓 평화 세력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거짓 평화에 속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화 지킴이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 자의 반열에 설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잃어버린 부흥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부흥을 회복하는 길 /강경민 평화통일연대 상임대표
기미독립운동이 대중화될 수 있었던 것은 전국 각지에 세워진 교회와 전국의 교회를 조직화할 수 있었던 노회와 총회가 탄생되었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민족의 독립운동에 참여하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물론 순수 복음 전도를 주장한 선교사들이나 지도자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민족의 독립을 염원하는 초대 교회 성도들의 마음까지 붙잡을 수는 없었다.
한국교회, 특별히 개신교는 독립운동의 중심에 서서 몸을 아끼지 않고 헌신했다. 그 결과 교회는 백성들에게 놀라운 신뢰를 얻었고 민족 사회의 희망이 되었다. 이것이 그 시대, 복음의 공공성이었다.
한국교회는 그 기운으로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섰고 복음 전도는 무서운 기운으로 국민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렇게 성장을 거듭해 온 한국교회가 지금은 역사의 기운에 눌려 천덕꾸러기가 되어 가고 있다. 지금 교회는 교회의 공공성에 대한 회의를 넘어 교회가 사회적 공의를 오히려 파괴하고 있다는 무서운 비난에 직면해 있다.
교회가 공공성을 상실한다면 교회의 복음 증거는 허공을 치는 공허한 메아리가 되고 만다는 것은 역사적 기독교의 증언이다.
오늘날 한국교회, 특별히 한국 개신교가 해야 할 첫 번째 과제는 복음의 공공성 회복이다. 한국교회가 존재하므로 한국 사회에 무슨 유익을 줄 것인가? 라고 묻는 한국 사회, 특별히 집단 지성의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 한국교회의 미래는 없다. 이것은 역사적 기독교가 준 값진 교훈이다. 지금 대부분의 교회를 휩쓸고 있는 신비주의는 이와 같은 역사적 교훈으로부터의 회피이다.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 안에 신비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지만 역사의식과 접목되지 않은 신비는 신비주의요, 종교적 환각으로의 도피이다.
한국교회가 어떻게 사회적, 역사적 공공성을 회복할 것인가?
못 다이룬 민족의 독립과, 진정한 해방을 주도하는 것이다.
한 민족, 두 국가로 양분되어 끝없는 갈등과 전쟁 기운을 내뿜고 있는 현실을 평화의 기운으로 진정시키고 마침내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는 일을 한국교회가 주도적으로 감당해야 한다. 70-80년대 한국교회의 통일운동은 엘리트 중심의 통일운동이었다. 그러나 이제는 온 성도가 함께하는 대중적 통일운동이 되어야 한다.
평화통일운동은 독립운동보다 어렵고 긴요하다.
평화통일을 이루어 내지 않으면 남과 북이 마침내 전쟁으로 만날 가능성이 가장 높기 때문이다.
전쟁의 참담함은 그 명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비참이요, 반역사이다. 이것은 너무나 당연한 성서적 교훈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반평화 세력은 있다.
이 땅에 평화의 기운을 짓밟는 세력이 존재한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기득권 세력이 자기 기득권을 옹호하기 위해 항상 해왔던 일은 반역사요, 반평화요, 반민족이었다.
그들에겐 기득권 옹호보다 더 큰 가치가 없기 때문이다. 해방 이후에도 일제 때 차지한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반민족 세력이 교묘하게 기득권 카르텔을 형성하는 데 일정하게 성공했다.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 수가 아직은 기껏해야 30%를 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다.
이 땅의 반민주, 반평화, 반민족 세력들이 이념이나 종교적 탈을 쓰고 있지만 저들의 본질은 기득권 옹호라는 것이 점점 드러나고 있다.
해방 이후, 점점 부강해진 국력과 인간의 탐욕이 결합해서 기득권 세력이 너무 커진 것은 사실이다. 이것이 평화통일운동을 훼방하는 가장 큰 방해물인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는 절망해서는 안 된다.
한편으로 기득권 세력과 싸우면서 한편으로는 간절한 마음으로 그들을 설득하면서 평화통일운동을 꾸준히 전개해 가야 한다.
전쟁 발발에 대한 무감각증은 거짓 평화 세력들이 만들어 낸 산물이다. 거짓 평화에 속아서는 안 된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화 지킴이를 넘어 평화를 만드는 자의 반열에 설 것을 강력하게 요구한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다시 잃어버린 부흥의 역사를 찾아야 한다.
한국교회가 부흥을 회복하는 길 /강경민 평화통일연대 상임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