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가 오염된 시대다. 어떤 시대든 정의(定意)를 선점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렇게 강자들의 정의 놀이에 허탈해하며 분루(憤淚)를 삼키게 하는 기만과 퇴행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본디 역사의 진보나 민중의 잠재력에 대한 낙관적(낭만적?) 기대보다는 망각과 우민화의 반복을 더 현실이라고 믿긴 했지만, 정의(正義)를 유린한 자들에 의한 ‘정의 사회 구현’과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계를 허문 유사 ‘보통 사람들의 시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문을 연 ‘세계화’라는 구호가 자유를 희롱하는 이들에 의해 너무 속히 재현된 현실을 지켜보는 고통은 만만치 않다. 약자를 배려하거나 편들지 않는 모두의(평등한) 자유는 결국 강자의 자유만을 증진시키고, 그것은 자유의 격차를 키울 뿐이고, 약자를 더 공포와 궁지로 몰아넣는다.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장되는 자유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가 분배하고 시혜를 베푸는 자유는 결국 ‘타자’의 망실을 유발하고, 타자가 없는 곳에 환대는 사라지고, 환대가 없는 평화는 평화일 수 없다. 자유라는 말의 오염은 평화라는 말의 오염을 가져왔다. <로마의 평화>(Pax-Romana)는 로마의 대표적인 선전구호였다. 그 평화는 로마의 칼과 병거 아래 굴종한 자들이 누리는 ‘숨죽인 평화’요 따라서 ‘유사평화’일 뿐이었다. 자유가 없고 타자가 없는 곳에 참다운 사랑도 없었고, 사랑이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열한 미소를 머금은 항복요구였고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그 로마의 폭력적인 정의(定意, definition)를 거부하고 전복시킨 소식이다. 칼의 ‘힘’이 아니라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심’(心)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가축화하고 물성화하여 오직 부리고 사용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에게는 가장 불온하고 불편한 소식이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소식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지금도 권력지향적이고 소유중심적인, 그래서 유치하기(childish) 그지없는 어른들에게 평화를 맡길 일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에의 의지도 없고 실제 일상에서 작은 혹은 잦은 평화를 구현할리도 없다. 아이들은 땅따먹기를 할 때 가위바위보나 주사위로 결정하고 내일은 다시 그 경계를 지우고 처음부터 그 놀이를 시작한다(reset). 싸움과 경쟁을 놀이가 되게 하는 그 아이다움(childlike)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분명히 어른들은 어제 끝난 그 자리에서 다시 하자고 할 것이고 격차를 벌이거나 역전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국제회의가 평화를 하사할 것이라고 믿지 말자. 오염된 말들로 엮은 괴변에 동조하지 말고, 사변에 현혹되거나 침묵하지 말고, 내 옆 사람에게라도 저런 허접한 정의를 수용하지 말자고, 그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소문을 내자. 망각하지 말고 깨어 있자고 말하자.
예수의 날은 도적같이 왔다. 그날을 맞이한 자들은 동심(童心)을 가지고 땅에서 하늘을 산 사람들이다. 시인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연민을 알리라”고 하면서 기성의 세계관(‘지붕을 덮은 쇠 항아리’)을 깨고 죽어가는 자들을 향해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민중을 하늘로 모시고 타자로 삼는 자들에게 평화의 희망을 걸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던 윤동주처럼, 우리를 짐승들로 길들여 가축화하려는 세상을 증오하고, 이미 위장된 평화 논의에 의해 <살해된 형제들과 연대>를 이루며 살아갈 일만 남았다. 그것이 어떤 일상으로 펼쳐질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신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말하는 그 ‘웃음’을 제안하고 싶다. 그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수정하게 만들 웃음, 다른 모든 책들의 위치를 이동시켜버릴 것 같다고 했던 그 웃음을 제안한다. 지나치게 엄숙하고 진지하고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꾸미는 권력자들의 가식적인 웃음을 머쓱하게 만들 동심의 웃음, 해학의 웃음, 기지의 웃음을 제안한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선택하는 어른들에게 <가위바위보>를 제안하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제안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하늘로 모시는 자들의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는” 일상을 제안한다. 그 해맑은 웃음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우리는 잘 알기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연민을 갖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지푸라기 하나 되어 주는 심정으로 사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평화의 날은 도적 같이 임하리라고 믿는다.▨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늘을 먼저 보라 / 박대영 광주소명교회 담임목사, <묵상과 설교> 편집장
언어가 오염된 시대다. 어떤 시대든 정의(定意)를 선점하려는 시도는 있었지만, 이렇게 강자들의 정의 놀이에 허탈해하며 분루(憤淚)를 삼키게 하는 기만과 퇴행의 시대가 이렇게 빨리 다시 오리라고는 생각도 못했다. 본디 역사의 진보나 민중의 잠재력에 대한 낙관적(낭만적?) 기대보다는 망각과 우민화의 반복을 더 현실이라고 믿긴 했지만, 정의(正義)를 유린한 자들에 의한 ‘정의 사회 구현’과 자본가와 노동자의 경계를 허문 유사 ‘보통 사람들의 시대’, 본격적으로 신자유주의의 문을 연 ‘세계화’라는 구호가 자유를 희롱하는 이들에 의해 너무 속히 재현된 현실을 지켜보는 고통은 만만치 않다. 약자를 배려하거나 편들지 않는 모두의(평등한) 자유는 결국 강자의 자유만을 증진시키고, 그것은 자유의 격차를 키울 뿐이고, 약자를 더 공포와 궁지로 몰아넣는다. 인간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보장되는 자유가 아니라 힘을 가진 자가 분배하고 시혜를 베푸는 자유는 결국 ‘타자’의 망실을 유발하고, 타자가 없는 곳에 환대는 사라지고, 환대가 없는 평화는 평화일 수 없다. 자유라는 말의 오염은 평화라는 말의 오염을 가져왔다. <로마의 평화>(Pax-Romana)는 로마의 대표적인 선전구호였다. 그 평화는 로마의 칼과 병거 아래 굴종한 자들이 누리는 ‘숨죽인 평화’요 따라서 ‘유사평화’일 뿐이었다. 자유가 없고 타자가 없는 곳에 참다운 사랑도 없었고, 사랑이 없는 평화는 평화가 아니었다. 그것은 저열한 미소를 머금은 항복요구였고 일종의 최후통첩이었다.
예수의 복음은 그 로마의 폭력적인 정의(定意, definition)를 거부하고 전복시킨 소식이다. 칼의 ‘힘’이 아니라 사람을 하늘로 섬기는 ‘심’(心)이 평화를 가져온다는 소식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가축화하고 물성화하여 오직 부리고 사용하는 대상으로 전락시키는 세상에게는 가장 불온하고 불편한 소식이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그 소식을 복음으로 들을 수 있는 사람은 스스로 지혜롭다고 여기는 자들이 아니라 아이들이라고 하셨다. 그러니 지금도 권력지향적이고 소유중심적인, 그래서 유치하기(childish) 그지없는 어른들에게 평화를 맡길 일이 아니다. 그들은 평화에의 의지도 없고 실제 일상에서 작은 혹은 잦은 평화를 구현할리도 없다. 아이들은 땅따먹기를 할 때 가위바위보나 주사위로 결정하고 내일은 다시 그 경계를 지우고 처음부터 그 놀이를 시작한다(reset). 싸움과 경쟁을 놀이가 되게 하는 그 아이다움(childlike)만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분명히 어른들은 어제 끝난 그 자리에서 다시 하자고 할 것이고 격차를 벌이거나 역전을 도모할 것이다. 그러니 어른들의 국제회의가 평화를 하사할 것이라고 믿지 말자. 오염된 말들로 엮은 괴변에 동조하지 말고, 사변에 현혹되거나 침묵하지 말고, 내 옆 사람에게라도 저런 허접한 정의를 수용하지 말자고, 그건 아니지 않냐고 말하고 소문을 내자. 망각하지 말고 깨어 있자고 말하자.
예수의 날은 도적같이 왔다. 그날을 맞이한 자들은 동심(童心)을 가지고 땅에서 하늘을 산 사람들이다. 시인 신동엽은 “누가 하늘을 보았다 하는가?”라고 묻는다. 그리고 “아침 저녁 네 마음속 구름을 닦고 티 없이 맑은 영원의 하늘 볼 수 있는 사람은 외경(畏敬)을 알리라...연민을 알리라”고 하면서 기성의 세계관(‘지붕을 덮은 쇠 항아리’)을 깨고 죽어가는 자들을 향해 “서럽게 아, 엄숙한 세상을 서럽게 눈물 흘려 살아가”는 자들에게, 민중을 하늘로 모시고 타자로 삼는 자들에게 평화의 희망을 걸고 있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서)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고 했던 윤동주처럼, 우리를 짐승들로 길들여 가축화하려는 세상을 증오하고, 이미 위장된 평화 논의에 의해 <살해된 형제들과 연대>를 이루며 살아갈 일만 남았다. 그것이 어떤 일상으로 펼쳐질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겠지만,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호르헤 신부가 그토록 두려워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말하는 그 ‘웃음’을 제안하고 싶다. 그 도서관의 모든 책들을 수정하게 만들 웃음, 다른 모든 책들의 위치를 이동시켜버릴 것 같다고 했던 그 웃음을 제안한다. 지나치게 엄숙하고 진지하고 뭔가 대단히 중요한 것처럼 꾸미는 권력자들의 가식적인 웃음을 머쓱하게 만들 동심의 웃음, 해학의 웃음, 기지의 웃음을 제안한다. 평화를 위해 전쟁을 선택하는 어른들에게 <가위바위보>를 제안하는 어린아이의 웃음을 제안한다. 모든 죽어가는 것들을 하늘로 모시는 자들의 “차마 삼가서 발걸음도 조심, 마음 조아리는” 일상을 제안한다. 그 해맑은 웃음에 얼마나 용기가 필요한지 우리는 잘 알기에, 서로가 서로를 향해 연민을 갖고 죽어가는 것들을 위해 지푸라기 하나 되어 주는 심정으로 사는 자들의 기도에 응답하여, 평화의 날은 도적 같이 임하리라고 믿는다.▨
평화를 말하기 전에 하늘을 먼저 보라 / 박대영 광주소명교회 담임목사, <묵상과 설교>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