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지성주의를 넘어서(22. 08. 16)

지난 5월 10일 열린 20대 대통령 취임식에서 나온 가장 눈길을 끈 단어는 ‘반지성주의’였다. 윤석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하는 요소라면서 반지성주의를 뛰어넘는 국가를 만들겠다고 말했다. 그는 “지나친 집단적 갈등에 의해 진실이 왜곡되고, 각자가 보고 싶은 사실만을 선택하거나 다수의 힘으로 상대의 의견을 억압하는 반지성주의가 민주주의를 위기에 빠뜨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을 해치고 있다”고 언급했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란 말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미국의 역사가 리처드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다. 그는 1963년에 『미국 생활에서의 반지성주의』란 제목의 책을 통해 매카시즘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뒤의 미국 지적 전통을 다루면서 반지성주의란 단어를 사용했다.

반지성주의에 대한 정의는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일반적으로는 ‘실증성이나 객관성을 경시하고 자신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세계를 이해하는 태도’로 규정할 수 있다.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라는 점이 중요하다. 지금 확증편향에 사로잡혀 있는 수많은 사람들과 단체들이 자기들만의 논리에 따라 자신들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주장을 펼치며 동조자들을 모으고 있는 것도 모두 반지성주의의 폐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교육사회학자 다케우치 요는 “사회의 대중화가 진행되면서 사람들의 감정을 부추기는 언동으로 표를 모으는 정치가가 나타나는 현상에서 반지성주의의 고조를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지금 도처에서 대중의 감정을 부추기면서 자신들이 원하는 바를 쟁취하려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극복하겠다고 공언한 윤 대통령을 통해 사람들은 반지성주의의 극명한 사례를 발견할 수 있다.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대통령의 이례적인 낮은 지지율은 그가 지난 100여 일 동안 보여준 반지성주의적인 태도에 기인된 바가 크다. 대통령이나 소위 ‘윤핵관’들이나 모두 자신들이 이해하고 싶은 대로 돌아가는 모든 정세를 이해하려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모습을 통해 새로운 시대, 건강한 보수의 시대의 회귀를 염원했던 이들이 등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적·사회적·종교적 요소가 들어 있는 단어인 반지성주의에 대한 윤 대통령의 이해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가늠하기 어렵다. 그러나 적어도 지금 대통령과 그 측근들의 모습에서 지성주의보다는 반지성주의의 그림자가 훨씬 더 짙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렵다.

최고 권력자에게서 보여지는 반지성주의의 모습은 비단 남한뿐 아니라 북한에서도 명확히 나타난다. 북한의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반지성주의라는 말을 쓰기도 힘들 정도로 대중들을 ‘조종’하며 자신이 원하는 바대로 통치해 나가고 있다.

사실 반지성주의라는 말에 부정적 뜻만 있는 것은 아니다. 반지성주의는 지성 자체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다기보다는 지성과 권력의 고정적인 결합에 대한 반감에서 나온다. 그런 면에서 반지성주의는 사회의 불건전함보다는 오히려 건전함을 나타내는 지표라고 할 수도 있다. 그래서 반지성주의 자체보다는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극복하려는 것이다.

지금 남한과 북한에서 공히 보이는 모습에서 ‘국가의 품격’은 찾기 어렵다. 남한의 경우에 세계 속 국가의 이미지는 올라가고 있지만, ‘품격 있는 국가’라고 말하기 어려운 모습들이 연일 나타나고 있다. 정말로 윤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밝힌 그대로 반지성주의의 폐해를 극복해 품격 있는 국가로 재건될 수 있다면 좋겠지만 점점 더 그런 기대감은 사라지고 있다. 북한은 말할 것도 없다.

반지성주의의 폐해가 거센 흐름 속에서 한반도의 평화는 위협받을 수밖에 없다. 남북한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가 이해하고 싶은 대로’ 상황을 판단한다면 양측 간의 ‘품격 있는 대화’는 요원하다. 사회의 리더들이 품격을 갖춰야 국가는 신뢰와 안정을 확보할 수 있다. 남북한 양측의 지도층에게 품격을 기대하기 어렵다는 데 한반도 평화를 갈망하는 우리의 고민이 있다.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