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기찬] 신뢰프로세스를 시작하자




박근혜 대통령은 후보시절 ‘한반도 신뢰프로세스'를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겠다고 공약한 바 있다. 당시 박근혜 후보는 신뢰가 있어야 한반도 갈등을 근원적으로 풀 수 있다고 보고, 정치·군사적 신뢰구축과 사회·경제적 교류협력의 상호보완적 발전을 통해 남북관계를 정상화하고 평화를 이루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신뢰를 쌓기 위해 우선 기존의 합의를 존중하며 약속을 지켜야 하고, 다양한 대화채널을 열어두고 북한의 지도자와도 만나는 것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지난 3월 13일 박 대통령은 국가원로와의 오찬에서 "북한 핵은 절대 용납할 수 없고 도발에는 철저히 대응하겠지만 한반도의 신뢰와 평화를 쌓아가기 위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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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지금이라도 북한 정권이 그동안의 약속을 지키고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온다면 우리 정부도 북한의 변화를 적극 지원하겠다"고 주장했다. 14일에 있은 아프리카·중남미 대사들과 접견할 때도 북한 도발에 단호히 대처하겠지만 ‘북한이 변화를 보이면’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하겠다고 설명했다.
박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남북 간의 합의정신 존중과 다양한 대화를 강조한 반면, 대통령이 된 이후에는 ‘북한이 평화와 공존의 길로 나온다면’, ‘북한이 변화를 보이면’이라는 조건을 붙여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하겠다고 한다. 여기서 제기되는 근본적인 의문은 ‘북한이 변하면 신뢰프로세스가 가동되는 것인지, 신뢰프로세스가 가동되어야 북한이 변하는 것인지’ 이다. 즉 신뢰와 북한의 변화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이다. 

신뢰를 한 마디로 정의한다면 ‘위험’을 감수하고 상대에게 ‘의존’하는 것이다. 즉 어떤 대상을 믿기 때문에 위험에 처할지라도 그 대상에 의존하는 것이 바로 신뢰이다. 상대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행동함으로써 나의 이익을 해칠지라도, 상대가 어떤 일을 할 능력이 없어서 내가 하려고 하는 일을 실패하게 할지라도 상대를 믿고 의존하는 것이 바로 신뢰이다.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우선 정보를 나누고, 의사결정에 상대방의 의견을 충분히 듣고 반영해야 한다. 그리고 장기적이고 반복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합의를 이루고 이를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태도가 특히 중요하다. 결국 신뢰는 자기를 부정하고 상대를 수용하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 상호의존적 관계가 되었을 때 비로소 형성되는 것이다. 

신뢰의 본질적 개념을 염두에 둘 때 남북 간의 신뢰는 어떻게 생길 수 있을까? 신뢰를 결과(result)가 아니라 과정(process)으로 볼 때, 지금과 같이 최고조의 갈등상태에 있는 남과 북은 어떻게 신뢰를 형성할 수 있을까? 신뢰를 형성하는 과정의 첫걸음은 대화이다. 형식적인 대화가 아니라 상대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마음에서 시작하는 대화이다. 북한의 위협에 굴복해서가 아니라 북한의 위협을 제어하기 위해, 그리고 신뢰를 쌓기 위해 대화가 필요한 것이다. 신뢰가 있어야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해야 신뢰가 생긴다. 북한이 변해야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하는 것이 아니라 신뢰프로세스를 가동해야 북한이 변한다. 

결국 북한의 행동이 변화되기를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먼저 다양한 채널을 통해 대화를 개시하는 것이 필요하다. 남과 북 각각이 한반도·한민족문제의 해결자라고 생각하고 대화하고 타협하는 과정을 오랫동안 계속하면, 북한도 남한에 대해 자신의 취약점을 노출시키고 의존하게 될 것이다. 즉 남한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물론 남한도 한편으로는 위험감수와 의존이라는 점에서 북한을 신뢰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신뢰가 형성된 경우에만 진정한 평화와 북한의 변화가 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