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화해 시대를 앞당기는 영적 상상력(21. 04. 06)

기독교신앙의 본질-적대성의 살신성인적 해소

지난 2018년 이후 두 차례 정도 이뤄진 북미 정상회담이나 남북정상 회담은 센세이셔널한 이벤트이긴 하지만 남북한의 평화나 화해를 추동할 동력은 없는 국제적 정치쇼로 그쳤다. 각각 지난날의 적대상태를 원통해하고 잘못된 역사라는 도덕적 자책과 후회, 회개가 동반된 화해에 의한 평화만이 하나님이 주장하시는 평화이기 때문이다. 국가지도자들 간의 평화회담에서 ‘지난날 우리의 적대관계에 대해서 미안하다. 우리가 잘못했다’는 식의 도덕적 자책담론이 나오기는 힘들다. 그러나 민간분야에서는 이런 도덕적 자책담론, 회개담론이 있어야 한다. 지난날의 불행한 전쟁과 반복, 갈등과 소모적 민족상잔을 회개하고 자책하고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는 사람들이 새 시대를 여는 하나님의 동역자들로 부상한다. 주전 586년 유다왕국이 멸망당하고 국가기간요원들이 바벨론 포로로 끌려갔을 때 바벨론과 항쟁하고 이집트로 망명한 사람들은 결코 회개하지 않았다(렘 44장을 보면 이집트 망명자들의 완악함의 진면목을 발견한다). 그런데 바벨론으로 끌려간 세대들은 민족멸망, 국가멸망, 이산과 유랑의 대파국적 재난이 자신들의 누적된 죄악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자책과 회개담론을 펼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수적으로는 이집트 망명자들이나 가나안 땅에 남아 있던 사람들에 비해 아주 소수였으나 하나님은 그들을 ‘좋은 무화과나무’라고 불렀다(렘 24:1-8). 예레미야서 전체와 에스겔서 전체, 다니엘 9장, 에스라 9장, 느헤미야 9장, 그리고 신명기 28-30장에 이들의 입장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이스라엘 민족내부의 평화와 화해를 다루는 이런 시적 본문 외에 역대기 또한 이런 동족상잔의 죄를 회개하고 민족화해를 도모하는 품넓은 신학을 담고 있다.

 

역대기의 민족화해 신앙-동족상잔의 시대에 꽃핀 형제화해 일화

역대하 28:8-15은 ‘구약판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불리는 충격적일 정도로 신선하고 감동적인 일화를 보도한다. 역대하 28:8-15은 북이스라엘 자손이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때(BC 735-732) 즉 아하스 왕 때 유다 자손을 사로잡아 사마리아에 개선하였을 때, 오뎃이라는 사마리아 거주 예언자가 나타나 형제 유다 사람을 침략하고 유린하고 심지어 그들을 포로로 잡아오는 북이스라엘 군 지휘관들을 크게 책망한 일화를 소개한다. 오뎃의 질책을 받고 감동한 북이스라엘의 병사들과 장군들은 기꺼이 자기몫의 전리품을 포기했다(대하 28:14). 병사들은 포로들을 재산처럼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포기하고 친절하게 그들을 대우했다. 왕의 명령이 아니라 예언자의 말씀에 감화되어(15절) 그렇게 했다.

더 나아가 북왕국 사마리아 백성들은 유다의 포로들을 형제들이라고 부르며(8절) 조직화된 포로구조 활동을 펼쳤다. 유다인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패배했으나 그들을 전쟁포로로 취급하며 사마리아까지 끌고 온 이스라엘 장군들의 행동 또한 의롭지 않다고 지적한 예언자의 말에 이스라엘 백성이 유순하게 복종한 것이다. 북왕국 이스라엘 백성들은 형제된 자들(유다 사람)을 포로로 잡아온 것은 죄임을 깨닫고 회개했고(10절), 자신들의 죄가 하나님의 진노를 초래했음을 인정했다(13절). 이렇게 하여 북왕국 장군들과 병사들은 자신들의 죄를 뉘우치고 회개함으로써 민족화해에 이르렀다(9-11절, 14절).

역대하 28:8-15은 결국 예언자적 지도력이 칼을 찬 군사지도력을 감화감동시킬 때에야만 남북지파 차원의 형제애 회복과 화해가 가능하다는 것을 잘 보여준 일화이다. 이 역대기의 선한 사마리아인 일화는 남북 왕국 갈등사의 중대한 변곡점을 이루는 시리아-에브라임 전쟁 기간에 일어난 사건이었고, 멸망기에 도달한 북이스라엘 민중의 만시지탄을 불러일으키는, 아름답고 슬픈 각성이었다. 역대하 28:8-15은 남북지파, 남북왕실의 갈등을 바라보는 도량깊고 차원높은 사상을 개진한다. 이런 기막힌 겨레화해를 성취한 요인들은 여러 가지이다.

첫째, 사마리아에는 야전 장군들(군사지도자들)을 감화감동시키는 야웨의 선지자가 있었다. 둘째, 야웨 하나님을 ‘너희 조상의 하나님’이라고 부름으로써 유다 백성과 이스라엘 백성이 한 하나님의 백성임을 순식간에 상기시켰다. 하나님이 남북지파들을 통일시키는 핵심구심력이었다. 역대기서는 분단 이전의 구원사에 대한 생생한 기억에 호소함으로써 동족상잔을 막으려고 했다. 예언자 오뎃은 민족적 양심을 순식간에 경각시키는 감화력의 소유자였다.

셋째, 유다(아하스 왕)에 대한 북이스라엘의 승리는 아하스 왕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의 결과(대하 27:19)였다는 점을 강조했다.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는 유다와 아하스에게 거둔 승리는 이스라엘의 의를 조금도 옹호하거나 증명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쟁 승리자가 누리는 전리품 처분권은 누려서는 안 된다는 논리가 성립되었다. 넷째, 형제들을 압제하고 노예로 삼는 죄악은 하나님께 범한 죄악이라는 것이다. 이것이 이스라엘 통일 국가를 분열시킨 여로보암의 죄악이었다. 즉시 형제들을 놓아주어야 했다. 이스라엘과 유다의 귀족층들은 형제들을 압제하고 노예화하는 죄악을 다반사로 범했다는 것이다.

역대하 28장 12절은 이스라엘의 야전군들을 막고 질책한 양심적인 지도자들의 면면을 소개한다. 에브라임 자손의 우두머리 몇 사람, 곧 요하난의 아들 아사랴, 무실레못의 아들 베레갸와 살룸의 아들 여히스기야, 하들래의 아들 아마사가 포로들의 사마리아 입성을 막았다. 이스라엘의 죄와 허물이 이미 야웨의 진노를 촉발시킬 만큼 누적되어 있는데 또 한번 누적된 죄악을 증가시킬 것인가 하고 따졌다. 이 사마리아 지도자들은 남북분단의 역사를 동포를 압제하고 노예화란 죄악의 역사라고 정의한 것이다. 동포들의 노예화, 포로화는 있을 수 없는 죄라는 것이다. 남북왕국 사이의 전쟁은 누가 이겨도 동포들을 압제하고 노예화하는 죄악을 범하는 것임을 강조한 것이다.

이 네 가지 논리적 설득 앞에 장군들은 방백들과 회중들 앞에 포로들과 전리품을 내려놓았다(14절). 그것은 전쟁의 야만을 상쇄하고 대속한 극한의 사랑과 자비 실천이었다.

 

결론-형제의 악마화 주술에서 벗어나 형제의 얼굴 속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아보자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부단한 대화이다. 더 나아가 역사는 과거와 역사가가 꿈꾸는 미래의 이상적인 사회상과의 대화이기도 하다. 남유다 왕국 출신이었던 역대기 저자는 남유다와 북이스라엘을 화해시키려는 관점에서 북왕국의 미담을 가감없이 후손에게 남겼다. 이런 점에서 역대기는 한반도의 남북화해 운동사를 적극적으로 회고하여 역사를 재구성해 보도록 격려한다. “상기하자 6.25” 식의 역사기억이 아니라, 남북간에 일어났던 모든 화해적 역사들에 대한 부단한 기억과 역사적 이상화를 통해 적대적 역사를 종식해보도록 초청한다. 7.4선언, 1984년 북한 쌀 구호 수용역사, 1990년 남북기본합의서, 6.15 남북화해 선언, 시드니 올림픽 남북단일팀 출전, 10.4 정상회담, 4.27 판문점선언, 6.12 북미정상회담 등 남북화해적인 역사들을 누적적으로, 중층적으로 기억하자는 것이다. 동족전쟁의 살육사를 기억하여 적개심을 고취하는 역사인식을 극복하자는 것이다. 본문은 남북간의 헤게모니, 정통성 갈등을 넘어 하나님 나라의 대의에 귀의하고 회개함으로써, 남북한이 상호 침투하고 흡수하는 방식으로 화해와 일치를 이루도록 권고한다.

그 일환으로 우리는 원수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역대하 28:8-15이 원수악마화 주술을 버리고 원수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찾을 수 있는 구체적 실례를 제시하고 있다. 이 역대하 본문은 원수버전으로 이야기를 경청해주는, 원수칭찬에 인색하지 않은 말씀이다. 역대하 28:8-15이 유다 사람에게 유포되던 시절은 남유다 사람들의 사마리아에 대한 인식은 극도로 나빴을 때였다. 그들은 배교자 집단의 우두머리인 여로보암을 따라가 결국 앗수르 제국에 멸망당해버린 나라였다. 지금은 앗수르 사람들과 뒤섞여 살며 혼혈문화를 만들어내던 배교의 온상이 되었다. 그런 사마리아에서는 결코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고 생각될 때였다(요 4장 사마리아 편견; 요 8장의 사마리아 편견).

그런데도 남유다 출신의 역대기 저자는 사마리아의 예언자들이 북왕국의 호전적이고 강경한 무장세력들을 감화감동시켜 유다의 포로들을 형제우애로 선대하고 치유하고 회복시켰다는 미담을 널리 전파했을 뿐만 아니라 책에 기록하기까지 했다. 북한 혹은 북한 사람은 남한 기독교인들이나 남한 사람들에게 어떤 점에서 사마리아 사람이라고 불릴 만큼 경멸당하고 무시당하고 있다. 북왕국과 남왕국 사이에 시리아-에브라임 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상처가 있었듯이 남북한 사람들 사이에는 한국전쟁이라는 무섭고도 치열한 상처와 적의의 기억이 살아있다. 남북간의 원수의식은 현실이다. 따라서 누군가가 먼저 원수 버전으로 역사를 재해석해주는 용기를 발하지 않는다면 분단은 영속화될 것이다.

황석영의 『손님』은 1950년 10월 17일-11월까지 약 45일 동안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미군(해리슨 중위)과 기독교인들에 의한 양민(공산당 색출작업으로 진행) 학살(35,000명) 사건을 들추어 내 원수 버전(version) 이야기 경청을 시도하는 가슴 아픈 소설이다. 비록 무속굿 형식으로 화해드라마를 연출했으나 『손님』은 남북화해를 위해 형제악마화주술 벗어버리기, 원수미담 칭찬하기, 원수슬픔 들어주기, 원수 논리 이해하기 등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김회권/ 숭실대 기독교학과 교수, 평화통일연대 평화담론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