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19. 04. 09)

올해 2019년은 3.1운동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100주년이 되는 해요, 4월 11일은 100년 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설립된 날이다. 종래는 4월 13일을 기념일로 지켜왔는데 정부는 올해부터 4월 11일을 기념일로 지킬 것이라고 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역사적 위치와 관련해서는 이미 헌법 전문에서 명시한 바 있다. 1948년 7월 17일에 선포한 대한민국 제헌헌법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 위대한 독립정신을 계승하여 이제 민주독립국가를 재건”한다고 해서 대한민국(임시정부)이 3.1운동으로 건립되었다는 것과 1948년에 대한민국을 재건한다는 것을 분명히 했다. 1987년에 개정하여 지금도 사용하고 있는 현행 헌법에는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고 못박아 대한민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한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3.1운동의 이념에 따라 건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대한민국 정부로 계승되었다는 것을 이렇게 법제화시켰다.

 

이승만 "대한민국은 3.1운동으로 건립"


대한민국이 3.1운동으로 건립되었다는 것을 처음 강조한 이는 이승만이다. 그는 1948년 5․10선거 후 처음 회집된 제헌국회 개원식(5월 31일)에서 앞으로 세울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후신임을 분명히 했고, 연호(年號)와 국가의 건립 연차(年次)도 임시정부 때의 그것을 그대로 계승하겠다고 하여 ‘대한민국 30년’이라는 연호를 집권 후에 그대로 썼다. 그가 계승하고자 한 임시정부는 한성정부였지만, 그 한성정부도 세 임시정부가 1919년 9월 11일 통합 임시정부로 재탄생하면서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사용했던 호칭을 그대로 사용했고 전통도 그대로 답습했던 것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이 1948년에 건국되었다’고 하는 당시 일부의 주장을 의식한 듯, 연합국이 해방시켜준 덕분에 세워진 대한민국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부끄러운 역사인식이라는 투로 말했다. 그에 의하면, 대한민국은 일제의 모진 압박 속에서도 기미(1919)년 3.1혁명을 통해 그 식민통치를 뚫고 세워진 것이라고 해야만 떳떳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은 3.1운동과 직결된다. 기미년 3.1운동에서 독립을 선언했으니 그 다음 단계는 나라를 세우는 것이었다. 여러 곳에서 정부가 건립되었다.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3.17)와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4.11), 그리고 한성정부(4.23)가 그것들이었다. 상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건립에는 3.1운동 직전에 상해로 파송된 현순 목사의 역할이 컸다. 그는 국내 민족대표로부터 상해에 파송되었다는 권위를 갖고 있었고 활동자금도 받아 갔다. 그는 상해에 도착하여 이광수․신규식․여운홍․선우혁 등과 임시독립사무처를 열고 북경․간도․연해주 등지에서 온 독립운동가들과 함께 정부수립에 들어갔다. 우여곡절 끝에 4월 10일 밤 10시부터 그 이튿날 오전 10시까지 상해 김신부로의 어느 양옥에서 13도 대표 29명이 모이게 되었고, 그 모임의 명칭은 ‘임시의정원’이라 했다. 임시의정원은 11일에 이르러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정하고 국무위원을 선출, 정부를 조직하고 대한민국 최초의 헌법이라 할 임시헌장을 만들었는데, 그 제 1조가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임”이었다. 지난 수천년간 계속되었던 왕국이나 제국의 체제를 벗어나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 ‘민국’ 체제를 만들어 헌법에 명시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지배구조상의 변화를 체제변화로 보고 이런 체제변화를 가능하게 한 ‘3.1운동’을 ‘3.1혁명’으로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 나오게 된 것이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지던 거의 같은 시기에 노령(露領)에서는 대한국민의회, 서울에서는 한성정부가 세워졌다. 1919년 5월 25일 미주에서 상해에 도착한 안창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내무총장으로서 국무총리 대리 역할을 맡아 이 세 정부를 통합해야 한다고 보고 정부 통합에 착수했다. 정부의 난립은 대외공신력에 큰 문제를 불러일으키는 등 여러가지 문제를 야기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는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 정부 및 한성정부와의 통합 교섭에 나섰다. 이에 앞서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로 선입된 이승만은 상해 정부에서 선임한 국무총리직 보다는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직을 선호했다. 당시 미주에 머물고 있던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Republic of Korea로, 집정관 총재를 President로 번역, 자기 명함에도 사용했다. 이런 사실을 알고 안창호는 한성정부의 헌법에서 ‘집정관 총재’를 ‘대통령’으로 고치는 것만 개헌하고 나머지는 일체 손을 대지 않은 채 1919년 9월 11일 통합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출범시켰다. 한성 정부의 집정관 총재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노령 정부의 이동휘를 국무총리로 끌어들임으로 통합 임시정부를 성립시켰던 것이다. 그 모양새는, 의회는 대한국민의회의 것을, 정부는 한성정부의 것을, 임시정부의 장소는 상해로 굳히는 결과로 나타났다. 정부통합을 위해 애쓴 안창호는, 통합 정부에서 격에 맞는 역할을 맡아야 한다는 중론을 억누르고 한성 정부의 ‘노동국 총판’ 직위를 그대로 유지함으로 통합 이후에 나타날 수 있는 잡음을 사전에 예방하려고 노력했다. 통합 임시정부는 안창호의 리더십과 설득력이 만들어낸 쾌거라고 할 수 있다.

 

통합 임시정부의 탄생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통합과정에서 많은 상처를 입었던 것도 사실이다. 통합정부를 이룩했지만, 노령에서는 이동휘를 제외한 분들이 상해로 오지 않았고, 한성정부의 집정관 총재였다가 통합정부의 대통령으로 된 이승만 역시 상해로 오는 것을 꺼렸다. 이미 그 전부터 이승만에 대해서는 그가 ‘위임통치’ 문제를 미국 대통령에게 호소했다 하여 곱지 않는 눈길을 쏟고 있었는데, 뒷날 이를 탄핵의 빌미로 삼았다. 통합 임시정부의 국무총리로 1919년 9월에 상해에 온 이동휘는 2개월 이상 취임하지 않았고, 이승만은 1920년 12월이 되어서야 상해로 왔다가 6개월도 채 머물지 않고 떠났다. 그 동안에도 이승만과 이동휘 사이가 좋지 않았고, 이승만을 옹위하는 기호세력과 안창호를 두둔하는 서북세력 사이도 좋지 않았으며, 안창호도 통합임시정부에서 곧 사임했다. 이런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부터 열렸으나 창조파와 개조파의 갈등만 키웠다. 이승만이 탄핵되고 대통령제를 국무령제로 또 국무위원제로 바꾸는 동안 임시정부는 파리를 날리듯이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김구는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거를 일으켰다. 1932년 4월 29일 홍구공원의 윤봉길 의거를 계기로 시작된 임시정부의 피난길은 1940년 중경(重慶)에 안착하기까지 계속되었다. 광복군을 조직하고, 주석제로 개편했으며, 건국강령 발표에 대일선전을 포고하는 한편 그 동안 일당으로 이당치국(以黨治國)하던 임정은 다당제 하의 임시의정원과 임시정부를 꾸리게 되었다. 1945년 해방 당시 독립운동 세력은 중경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비롯하여 연안의 조선독립동맹, 동북항일연군과 연관된 빨치산 세력 그리고 국내의 조선건국동맹 등이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들 세력과 연계하여 항일운동에 힘쓰려고 했으나 괄목할 만한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100년 전 수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외에서 27년간 존속하면서 한국의 근대국가 형성에 큰 족적을 남겼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임시의정원’이라는 대의기구를 통해 정치를 시작했다. 29명으로 구성된 ‘임시의정원’은 각도 대표의 성격을 띄고 있었는데, 서울․경기도․경상도 각 6명, 충청도․평안도 각 4명, 전라도 1명, 미확인 2명 등인데 함경도와 황해도가 빠진 것은 정부수반에 이승만, 군무총장에 이동휘를 의식했다는 분석도 있다. 임시의정원 구성원은 연령대별로 20대 7명, 30대 9명, 40대 6명, 50대 3명, 미확인 4명이었고, 독립운동 참여자가 18명이었으며, 종교별로는 기독교인이 주류를 이루었다. ‘임시의정원’은 ‘대한민국’이라는 국호를 제정하고 ‘민주공화국 헌법’을 만들어 ‘인민주권’과 ‘인민평등’을 처음으로 법제화하여 한국 민족사에 큰 변화를 일으켰다. 이당치국(以黨治國)의 근대적 정당정치를 시작한 임정은 1941년에는 ‘건국강령’을 발표, 사회주의적인 경제제도를 포용함으로 다당제(多黨制)와 여야 참여의 ‘연합정권’이 가능해졌다. 여당인 김구 주석과 야당인 김규식 부주석이 참여하는 공동연합정부를 형성하게 된 것은 이 때문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 예하에 직할군으로 광복군을 두었는데, 외국영토인 중국 안에서도 독자적인 군사작전권을 회복하였고, 2차세계대전이 벌어지자 일본에 선전포고하고, 소규모지만 미․영군과 합동작전도 모색했다. 외교면에서는 몇 몇 나라 외에는 승인을 받지 못했지만, 1943년 11월에는 중국의 장개석을 통해 한국의 독립을 보장하는 ‘카이로선언’을 이끌어내는 외교적 쾌거도 이끌어냈다.


이만열/ 상지학원 이사장, 전 국사편찬위원회 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