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여기서부터 선취해야 할 통일세상(20. 08. 18)

‘국가’(國家)에게 평화를 기대할 수 있을까? 나는 태생적으로 불가능다고 생각한다. 내전이든 외전이든 수많은 전쟁과 죽음은 건국과정의 필연이기 때문이다. 뿐만 아니라 국가는 자기중심적이며 자국의 이익을 중심으로 한 이기적 조직체이기 때문에 전쟁의 예비도구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이런 특성을 유전자로 가진 국가에게 평화의 확장을 요구한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국가의 상한(上限)은 힘의 우위를 통해 전쟁이 없는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평화는 누구의 몫일까? 하나님 자녀의 몫이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를 하나님의 자녀라 부른다. 크리스천은 하나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은 갈라진 둘을 하나로 만들고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온몸으로 헐고 평화와 통일을 이루라고 이 땅에 보냄 받은 교회이다. 그러므로 교회는 평화와 통일의 주체라는 자의식이 분명해야 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평화를 국가에게 맡기고, 스스로를 그들의 보조자로 인식하는 교회의 자의식은 얼마나 원통하고 슬픈 일인가? 하나님 아들의 자격지심은 겸손이 아니라 불신앙이다.

하나님의 명(命)은 말씀과 역사가 부딪히는 현장에서 주어진다. 역사의 아픔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하늘을 향해 눈물 흘리며 기도하는 하나님의 아들들을 통해 구체적인 하나님의 명은 발현된다. 이 명은 막연히 평화와 통일을 이루라는 추상적 당위나 요구가 아니다. ‘지금 여기에서’ 평화와 통일을 위한 구체적이고 정밀한, 필연적 행동에 대한 발견이다. 그 명을 볼 수 있는 자를 ‘시대의 예언자’라 부른다.

시대의 예언자를 통해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성이 드러난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을 뛰어넘는 초월적 하늘의 판단을 알게 된다. 그제야 통일을 위한 우리의 소모적 방황이 끝이 난다. 그제야 통일을 현실적으로 희망할 수 있게 된다. 교회는 이 땅을 위해 보내진 시대의 예언자다. 그러므로 교회는 분단을 극복할 수 있는 정밀하고 구체적인 길을 마땅히 제시해야 한다. 지금 이 시대는 혼돈(chaos) 가운데서 명확한 길을 제시할 수 있는 교회의 예언자적 자질의 회복을 요청하고 있다.

외부로부터 유입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를 피 흘리며 살아낸 민족, 탈냉전의 세계사 속에서도 여전히 분단으로 고통당하고 있는 유일한 민족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명과 축복이 있다. 남쪽 자본주의의 경험과, 북쪽 사회주의의 경험이 만나 만들어지는 새로운 체제에 대한 요청이다. 이것이 우리가 꿈꾸는 통일세상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통일은 한반도라는 공간의 한계를 넘어선다. 우리의 통일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경험하고 있는 근대의 절망을 넘어, 인류가 함께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국가 체제를 열라는 세계사적 요청이며 탈근대에 대한 가능성이다.

하지만 꿈으로만 존재하는 거대담론은 이상주의자의 사기술일 뿐이다. 끝내 모두를 절망으로 몰아간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향한 작은 한 점에 대한 애정이다. 겨자씨 한 알에 대한 믿음과 실천이다. 통일도, 새로운 체제에 대한 비전도 이 한 점에서 시작되고 완성된다. 그러므로 각각의 개 교회는 통일이 실현된 한 점이어야 한다. 통일세상은 지금 여기에 먼저 선취(先取)되어야 한다.

새로운 나라는 구체적으로 이 땅에 이루어져야 한다. 이 나라는 관념을 거부한다. 하나님의 뜻이 하늘에서는 이미 이루어졌으니 하늘은 우리가 신경 쓸 일이 아니다. 하지만 땅은 우리가 신경 쓰고 기도해야 할 영역이다. 각각의 개 교회 안에는 남과 북을 넘어서는 새로운 정치 구조가 실재해야 한다.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경제 시스템이 구축되고, 인류가 살아갈 수 있는 새로운 사회와 문화가 구체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이것이 통일에 대한 준비이며, 이미 이루어진 통일이다. 통일세상은 각각의 개교회 안에서 선취되어야 한다. 이 한 점들이 선이 되고 선이 면이 되는 날, 우리의 세계사적 사명은 과정 속에서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김은득/ 남북나눔 사무총장, 평화통일연대 전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