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역에서처럼 평화에서도 지구촌 롤모델이 되려면(20. 03. 17)

지난 3월 11일 세계보건기구(WHO)는 코로나19를 팬데믹, 즉 ‘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하였다. 감염병 위험 수준 단계 중 가장 높은 강도다. 코로나19로 인해 우리의 일상이 멈추어 섰다. 문득 2014년 세월호 참사가 기억난다. 수많은 아이들이 탄 배가 침몰하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목도하면서, 우리의 일상을 멈추고 개인과 사회의 가치관과 그 작동 방식을 철저히 재고해야 한다는 통절함이 있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하여 가고 있는가. 코로나19로 인한 활동 중단의 시기가 인생의 근원적 질문을 고요히 던지는 시간이 되기를 기대해본다.

코로나19 사태를 통과하면서 떠오르는 여러 단상들이 있다. 우선, 핵에 대한 탐욕이 다시 고개를 드는 현상이 염려가 된다. 기후변화가 감염병의 주요인이 된다는 사실을 근거로 다시 친핵 전환 입장을 내세우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원자력이 “깨끗하고 지속가능하며 값싸고 안전한 에너지”가 아니라는 점을 도외시할 수 없다. 더욱이 십 만 년 이상 방사선을 내뿜는 고준위핵폐기물을 이 땅에 유산으로 남기는 일은 다음 세대의 생명권을 도외시하는 비윤리적 처사이다. 미세먼지와 기후변화에 대한 장기적 대책은 탈핵 에너지 전환이다. 이와 함께 한반도의 복잡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도 찾아야 한다. 핵무기 보유국들과 남북 정부가 2017년 유엔에서 통과된 ‘핵무기금지조약’에 서명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해야 한다. 아무리 요원한 길이라고 해도 남한은 핵발전소, 북한은 핵무기를 안고 살아가는 우리 시대의 불안과 분단피로를 극복하기 위해서 피해갈 수 없는 도전이다.

한국만이 아니라 지구촌의 많은 활동들이 멈추어 섰다. 감염병은 국경과 인종, 계급과 성의 차별을 두지 않는다. 초국경적 재난극복을 위해서는 초국경적 협력과 연대가 필요하다는 것은 말할 나위가 없다. 갈등국면에서 무력 충돌을 불사하는 군사적 대응이 아니라, 인내와 대화를 통한 갈등해결을 지향하는 외교적 대응의 문화 내공이 전지구적으로 강화되어야 할 것이다. 냉전 시대에 서로 잡아먹을 듯 호전적 대척 관계이던 미국과 소련도 당시 만일 외계인이 쳐들어오면 힘을 합했을 것이라는 뼈 있는 농담이 있다. ‘팬데믹’은 인류가 공생·상생하는 길을 찾도록 만드는 일종의 외계인인 셈이다. 그런 만큼 공공의료 인프라가 부실한 북한 동포들을 위하여 보건안보에 힘을 합하기 어려운 현실이 더욱 안타깝다. 북한의 관영매체는 감염자 발생을 부인하고 있지만, 수천 명이 ‘자택격리’ 상황이고 이미 수백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언론 보도도 접하게 된다. 국가안보 차원을 넘어서는 인간안보를 위해서 ‘지구촌 공조’의 필요에 공감하는 시대에, 보통 사람들의 생존과 생명을 위한 인도주의적 ‘남북 공조’가 보다 원활하게 이루어지는 날이 속히 도래하기를 바란다.

요즘 신천지의 코로나19 확산 책임 문제가 언론의 주목을 받고 있다. 신천지가 이단종파임을 알게 된 어느 지인이 일반 교회가 자기 역할을 못해서 수십만 한국인이 신천지를 선택한 것 아니냐고 하는 말을 듣고 당혹스러웠다. 연이어 당혹스러웠던 또 다른 경험이 떠올랐다. 몇 년 전 ‘세계평화를 위한 여성과 종교의 역할’이라는 주제로 개최되는 한국의 컨퍼런스에 초청을 받은 레바논 여성이 필자에게 컨퍼런스 초청자에 관하여 문의를 한 적이 있다. 알아보니 신천지였다. 그 충격을 아직도 벗지 못하고 있다.

2019년은 3·1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해였다. ‘기미독립선언서’에는 조선독립이 조선만을 위한 것이 아니라 동양의 평화, 더 나아가 세계평화와 유기적 관계를 지니고 있다는 원대한 평화사상이 명시되어 있다. 한국교회는 일제 강점 시기에 탁월한 남녀 독립운동가들을 배출하였다. 여성으로는 김마리아, 유관순, 남자현 같은 분들이 대표적이다. 한국교회의 평화통일 기도회는 이러한 선배들의 정신을 오늘날 이어가는 노력일 것이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한반도 평화와 세계 평화를 위해 구체적으로 일할 수 있는 ‘평화를 만드는 자들’(마 5:9)을 교육하고 배출해서 그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면, 교회의 실질적인 역사적 공헌이 될 것이다. 3·1운동 백주년을 기리는 작년, ‘평화와 군축을 위한 세계 여성의 날’인 5월 24일에 서울 프란체스코 교육회관에서 ‘여성평화운동네트워크’가 발족되었다.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의 모임인 ‘노벨 여성 이니셔티브(Nobel Women’s Initiative),’ ‘평화와 자유를 위한 여성국제연맹(WILPF),’ ‘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등 국제여성평화운동가들과 함께 한국의 여성시민단체들과 YWCA가 주축이 되었다. 교회의 관심도 기대하고 싶다.

한국이 코로나19 방역의 세계적 ‘롤모델’이 되었다는 보도가 의미심장하게 들린다. 한국이 21세기 세계 평화운동의 ‘롤모델’도 될 수 있을까? 한반도 통일이라는 역사적 과제를 민의 참여로 평화적으로 이룩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1983년 한반도 평화와 통일을 위한 세계교회 협력의 시발점이 되었던 WCC 도잔소 프로세스에 크게 기여하였던 어느 외국인의 소회가 생각난다. “한국의 평화는 모든 인류를 위한 일종의 리트머스 시험지입니다. 우리가 한국의 70년 묵은 전쟁의 광기를 끝내는 방법을 찾을 수 없으면, 어떻게 전 지구적 생존을 위협하는 가장 긴급한 문제들의 해결을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캐나다인 에릭 와인가르트너)

한국교회의 정확한 역할이 필요하다. ‘칼을 쳐서 보습으로, 창을 쳐서 낫으로’ 전환하는 ‘예언자적 상상력’을 제공하는 신선한 샘물이 될 수 있어야 한다. 삶에 지친 한국인들에게 치유와 사랑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그루터기가 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우선적으로 교회의 본질과 사명을 재확인하고 ‘교회를 교회답게’ 하는 자성과 자정의 과정이 요청된다. 특히 개신교는 성서와 함께 시대의 표징을 신중하게 읽고, 말씀의 도전을 분별하며, 항상 자신을 개혁할 수 있을 때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할 것이다. 코로나19의 역경 속에서도 각처에서 정의와 평화의 순례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시는 분들에게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전한다.


배현주/ 세계교회협의회(WCC) 중앙위원, 평화통일연대 국제협력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