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희망이 있을까?(19. 12. 24)

평화의 왕 아기 예수의 탄생을 기념하는 기쁜 성탄절이다. 전례력을 지키는 교회는 대림절을 지키며 성탄을 준비한다. 교회로서는 새로운 한 해가 벌써 시작된 셈이다. 전례력은 예수님의 일생을 따라가면서 그 분의 탄생, 삶과 가르침, 그리고 죽음과 부활을 기념하며 예수님을 따르도록 인도한다. 옷깃을 여미고 주님의 탄생을 기다리는 이때야 말로 가장 기쁘고 설레는 교회의 절기 중 하나일 것이다. 그러나 현실은 기쁜 소식과는 거리가 멀다. 온통 불안하기만 하고 무엇이 옳은지조차 분별하기도 쉽지 않은 세상이다. 신앙생활 하기가 정말 어렵다고 많은 사람들이 호소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교회가 지키는 전례력의 끝은 대림주일이 시작되기 전 주일이다. 교회는 전통적으로 이 주일을 ‘왕이신 그리스도 주일’로 지킨다. 성경 본문은 누가복음 23장 33절~43절을 읽도록 권고 한다. 두 강도와 함께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님은 자신을 못 박은 자들을 용서하며 죽어 가신다. 그리고 십자가 위에는 ‘유대인의 왕’이라 쓴 패가 걸린다.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어가는 이분이 참으로 왕이시다는 말씀이다. 로마의 황제도 아니고 헤롯왕도 아니고 십자가에 죽어가는 이 사람이 바로 우리의 주님이시고 우리의 구원자라는 말씀이다.

성경이 쓰여진 당시의 시대적인 상황은 참으로 혼란스러웠다. 인구의 대부분이 농민계급이었고 지배계급은 로마의 식민지 통치를 대리하던 헤롯당원, 대제사장, 귀족계급들이었다. 게다가 로마의 황제에게 바치는 조세, 분봉왕 헤롯에게 바치는 공세, 성전에 바치는 성전세 등으로 대다수 농민들의 삶은 헐벗음과 굶주림으로 가득 찼다. 그래서 예수님의 생애를 전후에서 크고 작은 민란들이 일어났고 사람들은 새로운 세상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강력한 힘을 가진 지도자가 일어나 나라를 로마로부터 독립시키고 새로운 세상을 열어주기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십자가에서 강도들과 함께 죽어가는 이 사람이 우리들의 참된 왕이시라고 고백을 한다.

교회의 전통적인 전례력은 이것으로 끝난다. 그리고 대림주일이 시작된다. 바로 십자가 위에서 죽으신 이분을 기다리라는 말씀이다. 이분을 따르라는 말씀이다. 참된 평화는 로마의 평화가 상징하듯 무자비한 폭력으로 다른 사람의 생명을 죽이고, 정복하고, 지배하고, 다스리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드러난 하나님의 자기증여, 곧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생명만이 우리를 평화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이것은 불가능한 일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한국의 기독교는 십자가에서 자신을 내어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우신 생명과 평화를 담지하기에는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기 때문이다.

역사를 통해 볼 때 기독교는 수많은 전쟁을 일으켰으며, 선교라는 명목으로 제국주의의 앞잡이 노릇을 얼마나 해왔던가? 사람들을 고통에서 해방시키기는커녕 사람들을 억압하고 괴롭힌 적이 얼마나 많았던가? 그러나 또 한편 참된 평화는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 로마의 질서와 가치를 따르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의 길을 따랐던 수많은 신앙인들에 의해서 참된 평화는 시작되지 않았던가?

문제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어떤 복음을 따라 살아가느냐 하는 것이다. 언제나 그래왔듯이 세상의 가치로 덧입혀진 복음을 따르느냐 아니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따르느냐 하는 갈림길에 서서 우리는 새로운 성탄을 기다린다. 한 아기의 탄생을 통해 하나님의 위대한 사랑과 평화의 힘이 우리 가운데 힘차게 드러나기를 또다시 기다린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하나님이 기뻐하신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

박경조/ 성공회 주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