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체로서의 ‘코리아’에 대한 모색(19. 10. 15)

2018년 4월 27일 남한과 북한의 두 정상이 손을 잡는 역사적 장면이 연출되었다. 지난 6월 30일 북미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는 어느 때보다 급변하고 있지만, 남한은 주변 강대국의 움직임을 관망하고 있다.

우리는 남북문제와 한반도 통일에 대해 이야기할 때 두 가지 논거를 든다. 첫 번째는 한민족이라는 민족담론이다. 국제법상 강행규정인 민족자결권을 행사하여 각 민족의 정치, 사회, 문화 등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다는 것이다. 두 번째는 대한민국 헌법으로, 헌법은 한반도와 그 부속 도서가 대한민국의 영토임을 선언하여(제3조) 우리 법체계의 장소적 효력범위를 간접적으로 밝히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원래 하나였는데 자의가 아닌 타의에 의해 분단되었으므로 다시 하나가 되어야 한다고 하자면, 남북교류협력이나 통일의 당위성을 이야기하기 전에 ‘우리가 언제부터 하나였는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의 한반도라는 기점을 확립한다면 남북교류의 정당성뿐만 아니라 통일의 정당성도 도출할 수 있을 것이다.

서독의 경우 ‘전체로서의 독일(Deutschland als Ganzes)’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통일의 정당성을 도출하였는데, 여기에서 ‘전체로서의 독일’ 개념은 1990년 9월 독일문제의 최종결정에 관한 조약(Zwei-plus-Vier-Vertrag) 전문의 “베를린과 전체로서의 독일에 대해서는 2차 대전 전승 4대국의 권리와 책임, 특히 전쟁 중과 전쟁 후 이루어진 4대 전승국 관련 제 협정 및 결정에 유의하며…….”라는 규정에서 나온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이 주장할 수 있는 민족자결권을 독일식의 ‘전체로서의 한국’이라는 개념으로 비추어 보면, ‘전체’로서의 한국이 성립한 기점이 언제부터인지를 고민하여야 한다. 이를 광복절로 해야 하는지, 임시정부 수립일로 해야 할지, 아니면 대한제국을 선포한 날 등을 기준으로 해야 하는지 합의된 바가 없기 때문이다.

전체로서의 한국의 기점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제헌헌법에서부터 나타난 대한민국 건립에 관한 명문을 분석해보아야 한다. 먼저 1948년 7월 17일에 제정된 제헌헌법 전문에는 ‘기미 삼일운동으로 대한민국을 건립하여 세계에 선포한……’이라고 명시하였는데 이는 1952년 7월 1차 개정헌법과 1954년 11월 2차 개정헌법, 1960년 6월 3차 개정헌법, 1960년 11월 4차 개정헌법까지 계속된다. 1960년 민주화항쟁에 따른 정권 교체와 자유선거 실시 후 개정된 1962년 헌법은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4·19의거와 5·16혁명의 이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민주공화국을 건설……’이라고 명시하였으며 이는 1969년 10월 개정된 6차 개정헌법, 1972년 12월 개정된 7차 개정헌법까지 계속된다. 1980년 10월에 전부 개정된 8차 개정헌법에서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의 숭고한 독립정신을 계승하고 조국의 평화적 통일과 민족중흥의 역사적 사명에 입각한 제5민주공화국의 출발’을 명시하고 있으며, 현행헌법인 1987년 10월 개정된 9차 개정헌법에서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과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하고…….’ 라고 명시하여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창설되었으며 임시정부가 갖는 법적 정통성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 결국 현행 헌법 체제를 기준으로 한다면 ‘전체로서의 한국’의 기점은 임시정부 수립일인 1919년 4월 11일로 볼 수 있고, 그 당시 영토를 기준으로 하면 한반도 전체와 남북한 주민들이 통일의 지향점과 주체라고 볼 수 있다.

‘전체로서의 한국’ 이론은 북한의 헌법과 공식역사를 감안하지 못한 한국 중심적 이론일 수 있다는 한계가 있다. 무엇보다 북한은 남한의 대한민국 정부가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하고 있지 못하다고 평가하고 있는데, 대한민국 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인물들을 비롯한 독립운동세력을 철저히 배제하고 친미·친일 인사 위주로 조직된 단독정부이며, 이승만이 상해임시정부 주석이었던 김구를 암살하고 암살자를 보호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그 후의 남한의 정권들 또한 이승만 정권의 바통을 받아 상해임시정부 관계자와 독립 운동지사들을 탄압하였다는 사정들을 이유로 남한 정부는 상해임시정부의 법통을 말살한 범죄자로 평가하고 있다.

또한 상해임시정부에 대한 평가도 남한과 상이한데, 남한이 상해임시정부가 독립투쟁의 근거지 및 주권회복을 위한 운동을 펼쳤음을 강조함에 비해, 북한은 상해임시정부가 1919년 4월 중국 상해에서 조직되어 1945년 해체 될 때까지 장제스의 국민당의 보호 아래 간신히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점, 1940년 9월 상해임시정부가 중국 충칭에서 조직한 광복군도 장제스의 국민당 세력이 통수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근거로 상해임시정부는 항일무장투쟁의 주 근거지가 아니며, 북한 김일성의 조선인민혁명군 항일전 참여 및 조국해방의 역사를 강조하고 있다.

따라서 대한민국과 북조선의 역사적 현실을 고려한 ‘전체로서의 코리아’에 대한 논의가 필요하며, 이는 남과 북의 역사학자의 교류 및 공론의 장을 통해 풀어나가야 할 숙제 중 하나가 될 것이다. 앞서 논의한 ‘전체로서의 한국’의 기산점과 기준은 북한의 헌법과 북한이 인식하는 역사관과 상충하는 측면이 있기 때문에, 남북교류 시 한반도의 주체로서 ‘전체로서의 코리아(Korea as a whole)’는 남한과 북한이 수긍할 수 있는 역사적이고 공간적, 시간적 상징이 있는 시점과 장소를 기준으로 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2018년 남북정상회담 직후 남한과 북한이 추진한 사업 중 하나는 바로 고려왕궁인 개성만월대 복원사업이었다. 북한의 역사인식은 ‘정통론’의 관점에서 고조선-고구려-고려-북한 당국으로 계수되며, 북한 역사서에서 통일신라는 후기신라이고 삼국통일기의 역사는 고구려를 계승한 발해 중심으로 서술하고 있다. 실제로 고려는 왕건이 고구려를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국호를 고려라고 정했으며,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귀순하고 요나라의 침략을 받은 발해 유민들을 대거 수용함으로써 한민족의 왕조로서의 정통성을 가진다.

고려의 수도였던 ‘개경(개성)’은 남한과 북한 역사에서도 연고를 가지며, 개성이라는 공간은 국제도시이자 한반도 최고 경제도시로서 멀리 유럽 상인들에게 Corea라는 이름을 인식하게 한 개성 상인들의 활약이 있었던 공간이기도 하다. 현재 남한의 서울과 북한의 평양 사이에 있으며, 남북한의 연결고리였던 개성공단이 있는 공간의 상징성까지 가진다는 점에서 남북한 모두의 역사와 공간적 함의를 가지는 고려의 수도인 개성, 그러한 개성을 수도로 한 고려(Corea)의 건국 시기인 918년을 전체로서의 코리아(Corea)의 기점으로 보는 것도 유의미할 것으로 보인다.

전수미/ 변호사, 화해평화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