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워(Just War)와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19. 10. 01)

국제정치적인 관점에서 ‘전쟁’(War)에 대한 위험성은 상존한다. 미국의 입장에서 ‘불량 국가’인 이란에 대한 미국의 공격은 언제나 가능하다. 서구 언론들은 트럼프가 트위터로 선전포고를 할 수도 있다는 식의 풍자적 보도를 하고 있다. 지금은 대화를 모색하고 있는 모양새지만 일이 틀어질 경우에는 미국과 북한간에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전쟁주의자들은 자신들의 입장을 ‘정당한 전쟁(Just War)’으로 포장한다. 정당한 전쟁, 즉 ‘저스트 워 이론(Just War Theory)’은 지난 시절 동안 종교계에서도 수없이 제기됐었다. 1095년 11월 27일 교황 우르바노스 2세는 이슬람교도들과 싸워 성지를 되찾자며 ‘정당한 전쟁’에 나설 것을 촉구했다. 십자군 원정은 정당한 전쟁이란 명목으로 진행됐다. 그 명분에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다. 그러나 그 십자군 원정이 정당한 전쟁이라는 것은 한쪽만의 시각임은 물론이다. 한쪽의 정의가 다른 쪽의 부정의로 직결된다. 버락 오바마 전 미국 대통령이 노벨평화상 수상식에서 아프가니스탄 전쟁을 ‘저스트 워’라고 불러 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정당한 전쟁을 연구한 학자들은 정당한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가 요구된다고 밝힌다. 먼저 그 전쟁은 최후의 수단이어야 한다. 이것이 너무나 중요하다. 전쟁은 정당할지라도 마지막 방편이다. 모든 비폭력적인 방법이 소진된 뒤에 취할 수단이다. 따라서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여지가 있는데도 전쟁을 수행한다면 그것은 ‘저스트 워’가 될 수 없다. 비폭력적으로 해결할 수 있음에도 전쟁을 부추기는 것은 절대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정당한 전쟁은 올바른 목적을 갖고 수행되어야 한다. 오직 더 많은 희생을 막기 위한, 평화가 항구히 보장되게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만 치러져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합당한 이유 때문에 정당한 전쟁을 치르더라도 쌍방간의 희생자는 최소화해야 한다. ‘이에는 이, 눈에는 눈’이라는 3000여년 된 탈리오의 법칙은 등가보복(等價報復)을 제시한 것이다. 이 탈리오의 법칙을 무제한적인 복수 원칙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복수를 하더라도 등가적으로 하라는 뜻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무제한적인 보복이 아니라 ‘받은 만큼만’ 되돌려 주라는 뜻이다. 보복의 수단을 제한함으로써 원수까지도 사랑하라는 의미가 담긴 것이다. 물론 평화주의자들의 해석이다.

사실 성경 내에는 정당한 전쟁을 주장하는 사람들을 위한 성경구절이 적지 않다. “주님은 용사”라는 출애굽기 15장 3절로부터 누가복음 14장 31절과 같이 예수께서 합법적인 전쟁을 옹호하신 것으로 풀이할 수 있는 말씀이 있다. 신명기 1장 41절과 같이 하나님이 전쟁을 하도록 명령한 구절들도 있다. 잠언에도 “계획은 사람들의 뜻을 모아서 세우고, 전쟁은 전략을 세워놓고 하여라”(20:18)라고 나와 있다. 전쟁의 근거를 성경에서 찾으려 해도 수없이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저스트 워’에 대항하는 이론이 ‘저스트 피스메이킹(Just Peacemaking)’이다. 『저스트 피스메이킹』이란 책을 쓴 풀러신학교의 글렌 스타센 교수는 “모든 고려를 떠나, 어떤 이유에서도 전쟁은 불가하며 오직 평화를 심는 노력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개인적으로 스타센 교수를 여러 번 만났다. 미국 패서디나에 있는 그의 집에도 가 보았다. 너무나 멋진 크리스천 교수였다. 기독교 윤리학자로 그는 자동차 공해를 줄이기 위해 자전거로 출·퇴근 하는 분이다. 이라크 전쟁 때에는 풀러신학교 내 학생들과 함께 반전 기도회를 가졌었다. 그는 모든 크리스천들이 주도적 개혁을 위한 솔선수범(Transforming Initiative)을 하라고 강조한다. 이는 악을 대할 때 보복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적극적인 활동을 먼저 시작하는 것이 궁극적으로 악을 이기는 것이라는 뜻이다.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위해 적극적으로, 솔선수범해 나가야 한다는 주장이다. 스타센 교수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의 정신은 남아 있다.

사실 “평화를 이루는 사람은 복이 있다”는 산상수훈의 말씀과 같이 성경의 주 메시지는 평화요 사랑이다. 성경에 전쟁을 옹호하는 구절이 있기는 하지만 평화와 사랑을 강조한 구절의 수와 비할 바 아니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라고 했으며, 오른뺨을 때리는 사람에게 왼뺨까지 내 주라고 하셨다. 검을 쓰는 자는 검으로 망한다고까지 경고하셨다.

‘저스트 워’와 ‘저스트 피스메이킹’은 앞으로도 전 세계적인 논점이 될 것이다. 권력자들의 전쟁에 대한 욕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경우는 다르지만 지금 ‘조국 사태’로 인해 국내에서는 총칼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느낌이다. 보수와 진보 모두 자신들이 ‘저스트 워’를 벌이고 있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런 가운데 크리스천들은 어떤 경우에도 ‘저스트 피스메이킹’의 길을 찾아야 한다. 비탄과 분노, 적개심을 누르고 ‘오직 평화를 만드는 길’을 걸어가는 것이 예수 제자들의 삶이 아닐까 싶다. “이 세상에는 좋은 전쟁이란, 나쁜 평화란 없다.” 벤자민 프랭클린의 말이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 신자들이 언제나 염두에 둬야 할 경구가 아닐 수 없다.

이태형/ 기록문화연구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