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흔 노인의 간절한 꿈(21. 09. 21)

2021년 8.15 광복절 며칠 전에 그동안 끊겼던 남북 전화가 다시 개통되었다. 신문과 방송에 따르면, 전화선 개통 이전에 남북 정상 사이에 이미 몇 번의 친서 교환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북의 텔레비전을 통해서 들리는 김여정의 소리는 “8월로 예정된 한미합동군사훈련을 중단하라”는 것이었다. “시뮬레이션 방식으로 방위훈련으로 진행한다”는 남측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불과 며칠 전에 개통되었던 남북 연결 전화는 모두 불통이 되고 말았다. 북측에서 한 처사라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희망을 잃지 않고 있다. 이렇다 할 확실한 근거도 없이 이제 곧 남북 전화통화가 가능해질 것 같은 느낌이다. 2019년 2월, 하노이에서 노한 얼굴로 회담장을 박차고 일어나 작별인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헤어진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은 이미 백악관을 떠났고, 바이든 대통령은 아무 때고 북의 김정은 위원장과 만날 준비를 하고 있다고 한다. 이미 북의 김 위원장과 친서를 교환하고 있다는 문재인 대통령은 임기를 몇 달 남기지 않은 상태지만, 아무 때고 다시 평화회담을 독촉하거나, 북의 초청에 응할 준비가 되어 있으리라 믿는다. 나아가서, 내년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게 되는 후보들은 한결같이 평화통일 문제에 대해서 구체적인 정견을 내놓아야 할 판국이다.

보다 구체적으로 생각이 미치는 것은, 2018년 2월 평창 동계올림픽에 몰고 온 ‘한반도의 봄’이 2022년 2월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다시 ‘동북아시아의 봄’ 바람으로 불어오리라는 바람이고 갈망이다. 베이징 동계올림픽에 초청되는 미국 대통령과 남북한 정상이 중국의 정상과 자리를 함께하고, 한반도 문제에 대한 4자 정상회담을 개최한 자리에서, 무엇보다 먼저 1953년 7월 27일에 체결한 정전협정을 폐기하고, 6.25 한국전쟁의 종식을 선언하는 종전선언과 함께 영구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데 합의하면서, 한반도의 완전하고 불가역적 비핵화를 만천하에 약속하는 문서에 서명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4개국 정상들이 그렇게 몇 달 안에 움직인다는 것은 망상에 불과하고, 죽음을 앞둔 아흔 노인의 노망이 아니면 이룰 수 없는 ‘희망사항’이라고 웃어넘길지 모르겠다. 그러나 현직 남한의 대통령이 얼마 남지 않은 임기 동안에 얼마든지 있는 힘을 다해서 움직일 수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지금 서로 다음 대통령이 되겠다고 싸우는 각 당의 후보들이 자신들의 공약으로 한반도의 평화통일 정책을 제시해야 할 판에, 이번이 절호의 기회가 아닌가 생각한다.

나는 2001년 미국의 아시아기독교고등교육재단이라는 재단의 홍콩 사무실 창설의 임무를 띠고 부회장의 자격으로 일하면서, 옛날 만주의 연길에 세운 연변과학기술대학교의 창립자이며 총장인 김진경 목사를 알게 되었다. 김 총장이 북한의 김정일 위원장의 청탁으로 평양에 과기대를 창설하고 대학 건물 건립을 시작하면서 내가 일하던 재단의 지원을 요청하며 건설 현장에 초대하였다. 

그렇게 나는 2004년 5월, 평양을 방문하게 되었다. 일요일에는 평양 봉수교회의 초청으로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었다. 봉수교회 예배당 앞마당에 들어서면서, 10여년 전에 스위스 글리온에서, 그리고 미국에서 만나 영어 통역을 도와주었던 김혜숙 선생을 만났다. 글리온 회의 성찬식에서는 크리스천이 아니어서 떡과 포도주를 받지 못했지만, 평양에 돌아오자마자 봉수교회 교인이 되고 세례를 받고 성가대원으로 봉사하고 있다면서 나의 방문을 반가워했다. 그리고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김일성대학을 나와서 군대로 갔다고 자랑했다.

예배 도중, 목사님은 나를 소개하며 인사말을 하라고 했다. 아무런 준비도 없이 일어서서 입을 열었다. “1950년 전쟁이 터졌을 때 평양을 떠난 지 올해 꼭 54년이 됩니다. 와서 보니 대동강은 옛날과 다름없이 유유히 흐르고 있고, 모란봉의 소나무들은 반세기란 세월이 흘렀는데도 아직 푸르고,,, 그런데 세상은 많이 변했습니다.... 남조선의 그리스도인들은 주일마다 여러분을 위해 기도하고 있고, 평화와 통일을 기도하고 있습니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참느라고 애쓰고 있는데, 교인들은 벌써 소리 내어 울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할 말을 잃은 채 서둘러 인사말로 마무리했다. “여러분, 저는 오늘 잠시 다녀가지만, 반드시 다시 오겠습니다. 이번에는 베이징에서 비행기 타고 왔지만, 다음에는 기차 타고 휴전선을 넘어 우리 집 아들 손자 며느리와 함께 오겠습니다.”

내년 2022년 8월 15일에는 제2의 해방절, 광복절을 한반도의 남과 북을 오가며 열광할 수 있게 되지 않을까? 정말, 이 아흔 노인이 할머니와 아이들의 부축을 받으며, 평양행 기차를 타고 일요일 봉수교회에 가서 “제가 20년 전에 이 자리에 서서 ‘다시 오겠습니다’ 했는데, 여기 이렇게 다시 왔습니다”라고 인사할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2021년 8.15, 아파트 창문에 태극기를 달며 드리는 간절한 기도이다.

서광선/ 이화여대 명예교수, 평화통일연대 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