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와 핵의 공존(19. 08. 06)

해마다 8월이 되면 으레 8월 15일이 연상되고 그것은 곧 전쟁과 평화로 연결되기도 한다. 사관에 따라 국토분단, 해방(광복) 74주년으로 셈이 되는 올해도 한반도의 허리는 분단 띠를 확 풀어헤칠 조짐을 보이지 않는다. 몇 년 전에 비해 가능성은 훨씬 많지만 말이다.

지금으로부터 5~6년 전 쯤으로 기억된다. 신학대학원에서 ‘평화와 폭력(박충구 교수)’이라는 과목의 강의를 한 학기 동안 들은 적이 있다. 이때 처음으로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단어(평화와 전쟁, 평화와 폭력)에 담긴 역사를 밟으며 참 많은 번뇌에 잠겼었다. 공부했던 내용은 『두 얼굴의 종교: 평화의 폭력』(박충구, 홍성사) 책에 그대로 실려 있다. 고대 그리스에서부터 출발하여 구약시대와 예수시대를 거쳐 오늘날 ‘정의로운 평화’에 이르기까지의 역사를 ‘평화’의 줄기로 훑는다.

동전의 양면 같은 평화와 전쟁,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정당화해야 했고, 그 전쟁을 통해 수많은 이들이 평화가 아닌 폭력을 맛보고 죽음을 맞이해야 했다. 핵무기 역시 ‘평화를 지키기 위한 도구’라는 이 아이러니를 마주하면서 절로 ‘정의란 무엇인가?’, ‘평화는 누구를 위한 것인가?’ 등의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일어났다.

‘추석이란 무엇인가?’ 라는 칼럼에서 수많은 존재론적 질문을 던졌던 한 교수의 발상이 당기는 시점이다. “통일이란 무엇인가?” “평화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 때문에 평화를, 통일을 원하는가?” “우리는 왜 통일선교를 하는가?” “우리는 통일을 위해 일한다 하면서 왜 정작 가까운 곳에서부터 통일을 이루지 못하는가?” 아니 “통일을 피하는가?” “평화의 결여는 어디로부터 오는 것인가?”…. 내 주변의 삶이 평화로운 것 같은 지금도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지구촌에 저장되어 있는 1만 7천 여 개(박충구 교수의 강의 중)의 핵을 생각할 때 ‘평화’보다는 ‘불안’이 먼저 엄습한다.

중보기도사역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시점에 나는 미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들이 보유하고 있는 핵무기 양에 놀랐던 적이 있다. 왜냐하면 하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반대하니 세계에서 핵무기를 만들고 있는 나라가 북한이 유일한 줄로 알았기 때문이다. 결국 나도 모르게 버럭 했었던 그 순간을 잊을 수 없다. 한국에서 산 시간이 짧다보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몰랐던 나는 “아니, 지들은 그렇게 많이 갖고 있으면서 왜 북한은 핵을 못 갖게 해?”라고 소리를 질렀다.

나도 모르게 외친 이와 같은 개인의 ‘본능’적 태도만 보더라도 자국의 평화를 위해 ‘핵’을 보유한다는 것은 얼마나 타당한 일인가? 이는 핵을 만들고 보유하는 것을 찬성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었다. 깡패국가라고 불리기도 하나 수많은 약자들이 사는 북한은 어떻게 봐도 내게는 ‘약소국가’로 인식되어 있다.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내가 나서 자란 고향이라는 ‘본능’이 그런 외마디를 지르게 했던 것이다.

한반도의 평화프로세스를 풀어가는 그 중심에 놓여 있는 북한의 핵문제! 정말 하나님께서 어떻게 풀어가길 원하시고 우리는 어떻게 노력하고 있으며 무엇을 기도하고 있는가?

“I create the fruit of the lips; Peace, peace to him that is far off, and to him that is near, saith the LORD; and I will heal him.”(Isaiah 57:19, KJV)

이 말씀이 곧 한반도에 임하기를 기도한다.

박예영/ 통일코리아협동조합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