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앤조이] 이만열 교수, "3·1운동은 기독교의 정의·사랑·평화에 기초" (2015.03.02)


이만열 교수, "3·1운동은 기독교의 정의·사랑·평화에 기초"
평통기연, 96주년 삼일절 기념 예배…'3·1운동과 한국 그리스도인' 주제 강연



  • 이만열  (newsnjoy@newsnjoy.or.kr)
  • 승인 2015.03.02 12:22


역사학자이자 기독교계 원로인 이만열 교수(숙명여대 명예교수)가 3월 1일 광교산울교회에서 열린 '96주년 삼일절 기념 주일예배'에 '3.1운동과 한국 그리스도인'을 주제로 강연했다. 예배는 평화와통일을위한기독인연대(평통기연·상임공동대표 박종화·손인웅·이규학·이영훈·홍정길)가 주관했다. 이 교수는 현재 평통기연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이 교수는 1997년에 쓴 글을 토대로 3·1운동이 지닌 역사적 의미와 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역할을 소개했다. 민족이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독교인들은 교단과 종교를 넘어 일치단결하고 독립운동에 선도적인 역할로서 기여했다고 했다. 이런 배경에는 기독교의 가치인 정의, 사랑, 평화가 기초했다고 했다. 강연 말미에는 과거의 교회의 모습과 비교해 오늘날 한국교회는 어떤 위치에 있는지 돌아볼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150여 명이 자리한 예배당의 공기는 가볍지 않았다. 강사나 청중이나 모두 진지했다. 이 교수는 연도, 날짜, 인명 등을 세세하게 짚으며 정확하게 말하려 했고, 교인들은 한 글자도 놓치지 않으려고 강연에 집중했다. 3·1운동을 하다가 목숨을 잃은 순국선열을 기억하는 시간이 되길 바란다는 이 교수의 말처럼, 진중한 분위기였다.
<뉴스앤조이>는 이 교수의 허락을 받아 강연 전문을 싣는다. 이 글은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에서 발간하는 학술지 <한국 기독교와 역사> 제7호(1997.8.9)에 '3·1운동과 기독교'라는 제목으로 실린 바 있다. - 편집자 주
역사를 돌이켜 볼 때, 역사적 사건이 시대를 두고 새롭게 그 의의와 해석이 주어질 수 있을 때 그 사건은 생명력을 가졌다고 할 것이다. 시대는 바뀌지만 그 사건이 주는 교훈과 의미가 시대와 더불어 새롭게 해석되기 때문이다. 그런 관점에서 3·1운동은 우리 민족사에서 항상 새롭게 평가되면서 의미를 주어 왔고 앞으로도 줄 것이라고 본다.
오늘 우리가 3·1운동을 기념하는 모임을 갖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해방 70주년에, 3·1운동 96주년을 맞는 이 뜻깊은 해에, 우리는 당시 민족 독립의 염원에 대한 일제의 포악이 가장 야수적으로 저질러진 이 자리에 와서 그날의 비극을 상기하면서 다시는 내 조국 내 민족을 그런 비참하고 참담한 상태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되겠다고 다짐하는 그런 시간을 갖게 되었다. 먼저 우리는 96년 전 조상들의 그 나라 사랑, 민족 사랑의 뜻에 참여하는 각오를 다시 추스르는 한편 그날의 고혼들과 그들의 후예들이 겪었던 고통에 참여하는 귀한 시간이 되기를 빈다. 더구나 아직도 종군 위안부 문제와 독도 문제 등으로, 마음 문을 열고 흔쾌하게 일본을 우리의 진정한 이웃으로 맞기에는 부담스러운 벽을 대하고 있는 우리 민족에게 3·1운동과 제암리교회 사건이 주는 교훈은 크다고 생각한다.
오늘 우리는 96년 전의 '3·1민족독립운동'에 대해 먼저 민족사와 세계사에 끼친 역사적 의의를 되새기는 한편, 이 독립운동의 전개 과정에서 제암리교회를 포함한 당시의 한국 기독교가 어떤 역할을 감당했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 2015년 3월 1일, 광교산울교회에서 열린 삼일절 기념 주일예배에서 이만열 교수가 강연 중이다. 이 교수는 1997년 쓴 '3.1운동과 기독교'라는 글을 토대로 강연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3·1운동은 1919년 3월 1일 서울의 파고다공원과 태화관, 그리고 전국 9개 지역에서 '독립선언서'를 선포하면서 시작하여, 그 뒤 1년여에 걸쳐 우리나라 안과 만주·연해주 등 해외에까지 확산된 거족적인 항일민족독립운동을 일컫는다.
1.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이 운동은 1910년 8월 일제가 한국을 강점한 후 강요된 포학한 무단식민 통치로, 실의와 좌절 속에 빠져 있던 한국민에게 민족 독립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소망을 불어넣어 주었다. 3·1운동을 계기로 한민족사에는 다음과 같은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었다.
(1) 한성·블라디보스토크 등지에서와 함께 상해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그 해 4월 11일 창건되어, 일제에 항거하여 민족독립을 추진할 수 있는 거족적인 구심점이 형성되었다.
(2) 만주 지역을 중심으로 항일무장독립투쟁이 가능하게 되었는데, 3·1운동을 전후하여 북간도에서는 국민군회, 북로군정서, 대한독립군, 서로군정서, 대한의용군, 광복군 총영 등이 조직되어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1920년에는 홍범도 장군이 거느린 독립군 부대가 봉오동전투에서 일본군 500여 명을 사살했고, 같은 해 청산리전투에서는 김좌진 장군과 북로군정서 군이 일본군 1,200여 명을 섬멸하는 큰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3) 국내의 민족 운동에도 큰 힘을 불어넣어 주었는데, 한국인의 고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기성회의 조직을 비롯하여 한국산 물품 애용과 근검·절제 운동 등의 실력 양성 운동을 일으켜 백성을 깨우치고 독립을 준비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4) 특히 3·1운동은 항일독립운동 못지않게 민주 민족 운동 사상 중요한 계기를 마련하였는데, 그것은 두 가지 면에서 돋보인다. 첫째는 '백성이 나라의 주인'이 되는 '민주공화정'을 3·1운동이 추구한 국가적인 이상으로 제시하였는데, 이것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손병희·이승훈에게서 나타나고 있다. 그 전까지는 독립운동을 해도 옛 왕조를 회복하겠다는 정도의 '복벽 운동' 차원에 머물렀으나, 3·1운동의 지도자들은 일본 재판장의 심문에서 분명하게 '백성이 주인이 되는 나라를 세우겠다'고 소신을 밝혔던 것이다. 바로 이 이념이 상해임시정부의 헌법에 '민주공화정'으로 정착하였다. 둘째는 그 전에는 민족 운동사에 평민 지도자가 거의 없었는데, 3·1운동을 계기로 이 땅에서 양반 귀족 지도자 대신 평민 지도자가 민족 운동을 이끌어 가게 되었다.
강점 후 일제는 한국민을 두고 나라를 빼앗기고도 분통해하지 않는 나약한 열등 민족이라고 했는가 하면, 한민족이 일본의 식민통치에 열복(脫服)한다고까지 세계에 선전했다. 3·1운동은 우선 일본의 이러한 선전을 거부했을 뿐 아니라, 3·1운동을 민족의 저력을 확인하고 그것을 집약하여 한국 민족사를 새로운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계기를 삼았던 것이다.
3·1운동은 국내의 이 같은 민족 운동·독립운동에 끼친 영향 못지않게 세계사에 끼친 파장도 크다.
(1) 세계는 당시 1차세계대전이 끝나고 베르사유 체제가 출범하려 하였다. 이는 1차세계대전에서 승리한 전승국 중심으로 새로운 세계 질서를 재편성하려는 움직임으로 여기에는 패전한 나라들의 구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허락하는 듯했으나 전승국의 식민지에 대해서는 민족자결권을 암시하지 않아 계속 피압박 상태에 머무를 수밖에 없었다. 이때 한민족은 3·1운동을 통해 당시 전승국 대열에 끼어 있는 일제에 항거함으로 1차세계대전 후의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 질서를 비판하였다. 바로 이것은 피압박 민족의 입장에서는 세계 최초의 항거였다. 이렇게 함으로 1차세계대전 후 전승국 중심의 침략·강권적인 국제 질서 재편성에 도전하였다.
(2) 우리의 3·1운동에 자극을 받은 세계의 피압박 약소 국가들은 그들의 해방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중국에서는 이 해 북경대학생들을 중심으로 5·4운동을 일으켰는데 이 운동을 주도한 청년들은 한국을 본받자는 구호를 외쳤다. 인도에서는 마하트마 간디를 중심으로 비폭력·무저항의 '샤타 그라하' 운동을 일으켰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독립운동이었다. 필리핀·베트남·이집트 등지의 독립운동에도 직·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따라서 이런 의미에서 3·1운동은 그 세계사적 의의도 높다고 할 것이다.
'3·1독립선언서'에는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함과 동시에 '민족주의'가 빠질 수 있는 오류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는 대목이 보인다. 민족의 자주·자존을 강조하다 보면 자칫하면 다른 민족에 대하여 배타적이기 쉬운데, 우리의 '3·1독립선언서'는 우리 민족의 독립을 동양의 평화, 나아가서는 세계의 평화의 틀 속에서 강조하고 있다. 또 우리의 적대국이었던 일본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으로 공존(共存)과 호혜(互惠)를 강조하고 있는 것은 당시 피압박 상태에 있던 우리 민족의 성숙도를 보여 주는 것이라 하겠다.
2.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에 대한 시각
3·1운동이 위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가졌기 때문에 그동안 거기에 대한 평가도 다양하게 전개되어 왔다. 원인론과 주역론(主投해)에서 그 시각의 차가 크다는 것은 이미 학계에 알려진 바이지만 항일 독립운동뿐만 아니라 민주·민족 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에 대하여는 새로운 접근이 시도되고 있었다. 특히 3·1운동에 참여한 주역들에 대한 연구나 평가와 관련하여서는 그 주역들이 뒷날 일제에 굴절한 경력을 들어 3·1운동에서 행했던 역할마저 부정적으로 평가했던 것도 부정할 수 없다. 기독교계의 선도적 참여에 대해서도, 교회 안에서는 역사의식의 결여로, 교회 밖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시각 때문에 혹은 3·1운동 후에 훼절했던 기독교 인사들 때문에 3·1운동에서 차지하는 기독교의 역할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것도 사실이다.
기독교의 참여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하나로는 "기독교인들의 참여에는 전 교단적인 합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기독교의 집단적인 의지를 보여 주는 점이 보이지 않는다"는 지적인데 이것은 곧 3·1운동에서 기독교인들의 참여가 과연 기독교적인 조직과 이념·행동 방향 위에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느냐는 의문으로 연결된다. 기독교인 개인은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또 민족 구성원으로서 이 운동에 당연히 참여할 수 있기 때문에 굳이 기독교와 관련시킬 필요가 있느냐는 것이다.
3·1운동 때, (1) 한국 기독교인들은 이 거족적인 운동에 교단의 이름을 걸고 참여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선도적인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다방면에서 활동했고, (2) 기독교인의 참여 정도가, 뒤에서 볼 바와 같이, 다른 종교나 이념 집단에 비해 현저하게 우세하다는 사실은 평소의 기독교의 가르침이나 이념과 관련되는 것으로 기독교 자체의 성격 내지는 기독교회에서 평소에 그렇게 의식을 고양시킨 결과라고 보아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다. 이는 단순히 한 민족 구성원으로서 이 운동에 참여한 것이 아니고 확실한 기독교 신앙고백 위에서 참여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이 운동에 기독교인이 다수 참여한 것은 단순히 민족의 한 구성원으로서 나선 것과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에 대한 비판은, 3·1운동 후의 행적 때문에 비판을 받고 있는 기독교 지도자들 때문에 더하다고 본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33인 가운데 16인, 3·1운동을 점화한 48인 가운데는 24명을 차지하고 있다. 비판의 초점은, 다른 종교와의 합작에 동참할 수 있는가를 회의한 기독교 지도자의 사고와 3월 1일 당일 선포식에 참석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집중되어 있다. 이들의 행적에 대하여 많은 비판이 당연하면서도, 우리는 오히려 인간적인 한계와 연약성에도 용단을 내린 그들을 이해하려는 입장이다,
기독교 대표 16인은 동지들의 알선 또는 회합에 의하여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독립운동에 참여하라는 권유를 받은 신석구는, 교역자로서 정치 운동에 참가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할까, 천도교는 교리상으로 보아 상용(相 容)하기 어려운데 그들과 합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합한가를 놓고 고민하였다. 그러나 그는 새벽마다 하나님께 기도한 후 2월 27일 새벽에야, "4,000년 전하여 내려오던 강토를 내 대에 와서 잃어버린 것이 죄인데, 찾을 기회에 찾아보려고 힘쓰지 아니하면 더욱 죄가 아니냐"는 음성을 듣고 결심하였다 한다.
신석구 목사가 천도교와의 합작 문제를 놓고 소승적 입장에 섰다고 비판하고 있으나, 어려운 문제를 두고 기도했던 자세와 그 후 감리교 목사로서는 드물게 신사참배에 반대했던 그의 분명한 태도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과 민족 앞에서 고민하면서 신앙심과 민족의식을 일치시키려 했다고 본다. 이런 점은 당시 기독교 지도자들이 지녔던 공통 의식이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선언서에 서명할 때 다른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기독교 지도자들도 감옥에 가는 것은 물론 그보다 더한 죽음까지 각오하고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의 형편을 두고 유식한 사람들이 독립불능론(獨立不能福) 또는 독립시기상조론(時機尙早論) 등을 이야기하고 있을 때 그들은 우직하게도 자신이 죽어야만 열매를 맺는 '한 알의 밀알'이 되고자 했다. 그들은 독립의 열매를 거 두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민족 속에 독립을 심으러 간다고 하였다. 공소공판(控訴公判)에서, "피고는 항상 일한 합병에 불평을 품고 조선 독립을 희망하였는가"라는 질문에 답하는 기독교계 지도자들의 확신은 한결같이 감동적이다.
이승훈은 "그렇다. 하나님이 가르치시는 바가 있으니 오색인종 어느 누가 조국의 흥왕과 종족의 번영을 바라지 아니하며 더욱이 남의 나라의 병합된 자기 나라의 독립을 바라지 아니하였으랴"고 하였고, 이갑성은 "그렇다. 이 일은 일시적 감정에서 난 것이 아니라 근본적 독립사상에서 난 것이다"라고 하였다. 최성모는 "물론 기쁜 마음으로써 스스로 참가하였다"고 했으며, 신홍식은 "물을 것도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하나님의 뜻으로 되는 것이니 어찌하나 하고 참고 있었으나 차차 일본 정부의 참혹한 비인도적인 태도와 총독 정치의 압박과 핍박이 시시각각으로 고통을 주어 견디지 못하게 절박하여지므로 그저 있지를 못함에 이르렀다. 그에 따라서 조선 독립의 사상이 날로 더 가슴에 부글부글 끓게 되었다"고 했으며, 오화영은 "4,000년의 역사를 가진 조국을 잃어버린 망국의 민족인 이 사람으로 어찌 반대하지 아니하였으리요. 우리의 조선은 결코 다른 곳으로 부속되지 아니할 터이라고 확신한다, 조선은 조선 사람의 조선이 될 줄로만 믿는다"고 하였다. 그들은 조선인을 위한 조선을 회복하고자, 근본적 독립사상을 가지고, 기쁜 마음으로 죽음을 각오하고, 하나님의 가르치심에 따라 '부글부글 끓는 심정'으로 독립운동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아직도 선교사들의 직·간접적인 지배하에 있던 한국교회는, 신석구의 고백에서 짐작되듯이, 일제의 강점 이후 더욱 철저하게 '정교분리(政敎分離)'를 세뇌(洗腦)받고 있었다. 그렇게 세뇌받은 교리적인 벽을 뛰어넘어 '민족 문제'를 교역자의 종교 윤리 속에 동태화한다는 것은 남다른 고뇌와 결단을 필요로 했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과 '교회' 사이에서, 그리고 자신이 전수받은 '교리'와 식민지 백성이 처하고 있는 '현실' 사이에서 갈등하며 이 운동에 참여하였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들의 결단은 그들의 고뇌만큼 자리매김되어야 한다. 그들 중에 뒷날 좌절하고 신념을 꺾었던 분들이 있기에, 우리는 그들이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의지를 가지고서도 한때는 신앙과 민족을 일치시키려는 이 운동에 참여하였음을 더욱 깊이 이해해 보려는 입장에 서게 되는 것이다.
  
▲ 150여 명의 사람이 이만열 교수의 강연을 듣고 있다. ⓒ뉴스앤조이 박요셉
오늘날 3·1운동에 대한 연구는 종전보다 훨씬 다각적인 이해를 요청하고 있다. 우선 운동 주체면에서, 33인 또는 48인 중심이라기보다는 전 계층, 전 민중적인 차원에서 이해하고 있는데, 이는 3·1운동을 준비적인 단계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단계 등으로 시각을 확장시킨 데서 가능한 것이었다. 둘째, 운동 원인의 측면인데, 종래에는 민족자결론 혹은 1917년의 10월 혁명의 국제적인 파급(북한 사학)에 의해 혹은 재만(在滿)독립운동의 영향으로 일어난 것이라고 생각되어 왔으나, 현재에는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지 않으며 오히려 일제의 무단통치와 이에 따른 한국인의 독립 의지에 역점을 두고 있다. 셋째로, 운동의 전개 방식 문제인데, 종래에는 선언서 중심으로 파악하여 비폭력 무저항 평화 운동으로 보았으나 오늘날에는 운동이 전국화하는 과정에서 폭력적 저항 운동의 성격을 띄었다는 것도 부인하지 않는다.
3. 3·1운동에서 한국 기독교의 역할
이러한 3·1운동 인식의 방향 전환은 3·1운동을 준비·점화 단계를 강조한 과거적 시각에서, 준비(점화) 단계 → 전국화 단계를 거쳐 독립운동의 새로운 방향 설정을 모색하는 '정리 단계'로 넘어간다고 파악하고 있는 형편이다. 3·1운동의 이러한 진행 단계에 따라 기독교의 역할과 그 참여 정도를 이해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1) 준비(점화) 단계의 역할과 문제점
우선 3·1운동에 앞서 기독교계는 여러 갈래로 독립운동을 준비하고 있었고, 3·1운동의 점화 과정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감당했는데, 그 몇 가지를 거론하면 다음과 같다.
(1) 평양의 선우혁과 서울의 이갑성에 의해 기독교 중심의 독자적인 독립운동이 준비되었으며, 이것이 이승훈에 의해 천도교·불교와 합류되었다.
(2) 2·8독립선언의 주체는 학우회(學友會)였지만 그 실체는 송계백·서춘·백관수·윤창석·김도연 등 기독교인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재일한국YMCA 총무 백남훈이 있었으며, 장소도 재동경(在東京)YMCA였다. 이 선언의 모체와 관련, 장로교·감리교는 YMCA를 중심으로 재일한인교회를 성립시켰음을 주목해야 한다.
(3)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16인이, 48인 가운데 24인이 기독교인이었다.
(4) 선언서에 나타난 독립사상은 민족의 독립을 주장하면서도 폐쇄적인 민족주의를 초월한 보편적 가치관과 인류 공존을 지향하는 비폭력적 평화이다. 이러한 사상에 대해 독립선언 초안자인 최남선은 선언서의 내용이 기독교 이념과 관련됨을 증언하였다.
그러나 준비 단계에서 기독교계 독립운동의 한계 내지는 문제점이 노출되었는데, 다음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다.
(1) 자금 문제로, 기독교가 5,000원을 천도교에서 빌려 왔다. 당시 기독교는 분권적이며 민주주의적 조직으로 단시간에 자금 모금이 어려웠고 모금 과정에서 운동 계획이 사전에 발각될 수도 있었다. 이에 반해 천도교는 중앙집권적이었으므로 모금 관리가 용이하여 풍부한 자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이 5,000원은 원래 요청할 때에 의도했던 기독교 대표자들의 가족 생계비로서는 거의 사용되지 않았고, 선언서의 인쇄·전달 동 독립운동비로 사용되었다.
(2) 천도교와의 합작·불가의 문제로 이는 신석구 목사의 경우에 보이고 있었는데, 이런 점은 다른 기독교 지도자들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러나 신석구 목사와 같이 기독교 대표들은 이런 정교 분리적인 고민을 극복하면서 이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였다.
(3) 기독교인 민족 대표 16인 가운데 3명은 선언식에 불참하였다. 유여대 목사는 그때 의주에서 독립운동을 주도하는 것 때문에, 길선주 목사는 부홍회 인도 약속 때문에, 김병조 목사는 망명한 상태였다. 그는 뒷날 상해임시정부와 상해 한인교회를 위해 큰 역할을 감당하였다.
(4) '독립선언'인가 '독립청원'인가의 문제이다. 기독교의 입장은, 통일된 것은 아니었지만, 일제의 강점을 하나님이 주시는 고난과 채찍으로 받아들이는 인식 때문에 '독립청원'으로 할 것도 고려하고 있었다. 문제가 있지만, 이것을 비겁성 때문이라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자세가 1920년대 국내에서의 기독교 민족 운동의 방향이 실력양성·자치론의 개량주의(改良主義)로 빠지게 되는 것과 관련해서는 그 한계성이 지적되어야 한다.
(5) 독립 방법은 기독교적 성격을 지닌 비폭력성이었다. 이는 평화 애호로, 전략적으로도 이것은 많은 사람의 호응을 불러일으키게 되었다. 운동 방법의 비폭력성과 관련, 그것이 현실적으로나 도덕적 정당성의 측면에서 훨씬 설득력이 있었다는 지적이 있다.
2) 전국화(거족적) 단계의 역할
3월 1일, 서울과 지방 9개 곳에서 시작된 만세 운동은 3월 4일쯤부터 전국적인 단계로 확산되었고 거족적인 민족독립운동으로 발전하였다. 일제는 비폭력적인 만세 운동을 폭력으로 진압하였다. 따라서 이 단계의 한국인의 운동도 저항적, 폭력적인 성격을 띄게 된 점도 없지 않았다.
전국화의 단계에서도 기독교계의 운동이 돋보이는데, 우선 만세 운동의 주도성 문제와 관련하여, 기독교의 역할을 다음과 같이 지적할 수 있다.
(1)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있으면 대부분 기독교인들 중심이었다. 예를 들어 3월 1일 첫날 서울 외의 8곳이 모두 기독교계 중심이었고, 의주와 평양은 목사들이 주동하였다.
(2) 만세 운동이 일어난 곳에 천도교회가 있으면 더러 천도교와 합작하였다. 운동의 주동 세력이 뚜렷한 311개 지역 가운데 기독교·천도교 합작 지역이 42개 지역으로 나타나는 것이 바로 그 증거다.
(3) 운동이 일어난 지역에 교회나 기독교계 학교가 없으면, 천도교가 단독으로 하거나 혹은 유생·농민 중심으로 만세 운동이 일어났다.
두 번째로, 전국화 단계의 운동 참가 통계에서 기독교계의 참여 정도는 이렇다. 일제의 불확실한 통계는, 운동의 참가자와 피해를 (1) 1919년 3~4월 1,214회에 110만 명, (2) 1919년 3~5월 1,542회에 202만 명, (3) 전국 218개 군 가운데 212개 군, (4) 사망자 7,509명, 부상자 15.961명(45,562명), 피검된 자 46,948명(49,811명), 가옥 소실(燒失) 724채, 교회당 소실 59채, 학교 소실 2개나 된다고 보고하였다.
여기서 기독교계의 참여도는, 우선 일제의 대(對) 기독교 정책으로 보아 기독교인이 신문(訊問) 과정에서 자신의 신분을 감추어서 그 정확성이 의문시되지만, 대략 다음과 같이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1) 운동의 주동 세력이 뚜렷한 340여 회는 311개 지역으로 압축되는데, 그 가운데 기독교 78개, 천도교 66개, 기독교와 천도교 합작 42개 지역으로, 기독교가 25% 내지 38%였으며, 기독교나 천도교가 아닌 지역은 125개 지역이었다. (2) 체포·투옥자와 관련, 6월 30일까지 투옥자 9,458명 가운데 기독교인이 2,087명으로 22%를 차지하였고, 12월 말까지 복역자 19,525명 가운데 기독교인은 3,373명으로 17%이고, 천도교인은 2,297명으로 11%였다. 이 통계는 바로 기독교인의 운동량을 계량화한 것이라고 할 것이다.
위의 통계를 당시의 한국의 인구와 대비해 보면, 기독교인의 역할은 더욱 뚜렷해진다. 이때 한국의 인구가 1,600만 명 정도였는데, 기독교인은 20만 명을 상회하여 한국 인구의 1.3~1.5%를 차지하였다. 거기에 비해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주동 세력 면에서 25~38%, 체포·투옥 면에서 17~22%라고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따라서 3·1운동에서 기독교인의 운동량은 대략 20~30%로 계량화할 수 있다고 본다. 그렇다면 당시 1.3~1.5%의 기독교 인구가 3·1운동에서 행한 역할은 20%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를 다시 천도교의 교세와 비교해 보자. 1919년 3월 천도교 교주 손병희(孫秉熙)의 법정 진술에 의하면, 명부등재자[錄名者] 300만 명, 의무 부담자 200만 명이라고 하였다. 이는 기독교세의 10배에 달하는 교세다. 거기에다, 19세기 말 이래 민족주의 운동의 중요한 흐름인 민중사상계(東學)를 이끌어 온 세력으로, 사상 면이나 교세 면, 그리고 민중 동원 능력 면에서 뛰어난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3·1운동에서 활동한 역량은 그보다 10분의 1정도의 세력밖에 되지 않는 기독교보다 절대적인 수치에서도 뒤떨어지고 있다. 이것은 반대로 기독교가 이 운동에서 어떤 위치에 있는가를 보여 주는 것이라 아니할 수 없다.
기독교도의 참여가 이렇게 적극적이고 광범위하였기 때문에 그 결과 일제의 박해도 다른 종교에 비해 컸다. 제암리교회에서는 비신자를 포함하여 한꺼번에 29명이 희생되었다. 1919년 3·1운동으로 한 달이나 늦게(10월 4일 개회) 그것도 그 해 총회장인 김선두 목사가 3·1운동으로 '미참'(未參)한 상황에서 열린 장로교 제8회 총회에서는, 사살·타살 52명(각 노회 보고), 체포된 신자 3,804명(이 가운데 목사·장로 134명 - 장로교 전체 목사·장로 1,024명 가운데 13%에 해당)이나 되었다. 총회에 보고한 노회의 보고는 '대한(조선) 독립 운동' 혹은 '독립 사건'으로 표현하고 있다.
그러나 운동이 전국화하는 단계에서 기독교가 갖는 문제 또한 없지 않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기독교 대표 16명 가운데 3명이 불참하였는데, 그 이유가 납득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또 당일 서울의 선언 발표 장소를 명월관으로 옮긴 것이 선교사 베커(Becker)의 제의에 의한 것이었다는 점도 기독교 운동의 한계와 관련된다고 할 것이다. 일제가 폭력으로 나오는 데도 교단적 차원의 대응이 없었다는 점도 지적할 수 있다. 물론 제암리의 만행을 세계에 알려 그 여론을 환기하는 데는 선교사 스코필드(Scofield) 등의 노력이 있었다. 끝으로 당시 장로교·감리교 연합 기관지인 〈기독신보〉 등의 보도 태도는 일제의 언론 검열 때문이었다고는 하나 그 대응이 대단히 미약했다고 지적된다.
4. 기독교가 3·1운동에 적극 참여한 원인
그러면 이처럼 기독교가 민족 독립운동에 적극 참여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 점과 관련, 우리는 먼저 기독교의 민족관이 어떠한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을 전후하여, 일본의 군국주의, 독일의 나치즘, 이태리의 파시즘 등으로 인해 민족과 민족주의를 부정적으로 보게 되었고, 미·소의 다민족·이념 중심적 국가의 영향은 전후 1950년대까지 민족(주의)을 부정시하였다. 그럼에도, 민족이란 그리스도인이건 아니건 하나님이 인생을 내시면서 같은 언어와 문화 전통과 혈연 속에서 살도록 한 은총이다. 사도행전 17장 26절에서 언급한 바[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정)하셨다]와 같이, 바울은 민족을 '창조와 섭리'의 질서 위에서 이해하였다. 이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인류를 보존하시는 방법으로 민족이라는 범주를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민족을 보존하는 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질서에 순용, 동참하는 것이다. 이 보존은 피를 보존하는 것일뿐 아니라, 하나님이 창조와 더불어 주신 민족의 정체성으로서의 '문화'를 보존하는 것이기도 하다.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은 이것을 깨닫고 민족 회복에 나선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와 섭리의 질서 위에서 이해한 이같은 민족관이 민족 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을 그들의 신앙고백과 일치시킬 수 있었다고 본다.
두 번째로 한 말이래 기독교인들의 민족의식·민족 운동의 전통을 적극 참여의 배경으로 지적할 수 있다. 흔히 말하는 대로 아시아·아프리카의 여러 나라는 기독교 국가의 침략을 당하였으나, 우리나라는 일본이라는 비기독교 국가에 의해 침략을 당함으로써 기독교 이념에 입각하여 민족 운동이 가능하였다. 한국의 기독교 민족 운동이 한 말부터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지적된 바 있는데, 그 연장선상에서 3·1운동을 주도해 나갔다고 보여진다.
1905~1910년 사이의 기독교인들에 의한 민족 운동은 장인환의 스티븐스 암살, 전덕기의 을사오적 처단 미수, 안중근(가톨릭)·우덕순(기독교)의 이토히로부미 암살, 이재명의 이완용 암살 미수 등에서 극명하게 나타났는데, 이렇게 한말부터 기독교인들은 매국 원흉 제거 등에 앞장섰다.
세 번째로 기독교계의 교단 조직화가 이 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장로교의 경우만 하더라도 1907년에 독노회를 조직하고, 1912년에 총회를 조직하는 등 교단을 조직화하였다. 1918년에는 일제가 조선기독교를 장악하기 위한 협의회를 조직하려 하자 이에 대항하여 연합 단체를 결성하였다. 그렇게 함으로 기독교계는 3·1운동에 앞서 전국적인 연락망을 구축하게 되어 3·1운동에 조직적으로 참여하는 것이 가능하게 되었다.
넷째로 일제가 강점한 후 예배를 방해하고 설교에 제재를 가하는 등 종교의 자유마저 박탈하려 하였다. 특히 금주·금연에 관한 설교나 '다윗과 골리앗'을 주제로 한 강론도 감시의 대상이 되었다. 거기에다 강점한 지 얼마 안 되어 벌인 '105인 사건'은 기독교 지도자들을 노골적으로 탄압하려 한 사건이었다. 1915년에는 사립학교법을 개정하고 포교법을 제정하여 기독교학교의 성경 공부와 채플 등을 금지하고 선교를 방해하였다. 이것은 한국인에 대한 생존권의 위협에다 이제는 신앙의 자유마저 빼앗아 버리려는 것이었다. 이제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도 궐기치 않을 수 없었다.
끝으로 우리는 당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인들의 신앙적인 행동에서 그들의 신앙과 민족 사랑을 일치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였던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이미 모세·삼손·다윗·다니엘의 사적 등을 통하여 이스라엘 민족의 고난의 역사를 우리 민족의 역사와 대비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3·1운동의 만세 시위가 한창일 때, 기독교회가 작성한 '독립단 통고문'을 뿌렸다.
내용은, (1) 매일 3시에 기도하고, (2) 주일은 금식하고, (3) 매일 성경을 읽는데, 월요일에는 이사야 10장(이스라엘을 멸망시킨 앗시리아에 대한 하나님의 정별), 화요일에는 예레미야 12장(유다가 멸망한 원인에 대한 설명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을 버리셨기 때문'), 수요일에는 신명기 28장(이스라엘 백성이 다른 민족에게 침략받아 고통받게 되리라는 예언), 목요일에는 야고보서 5장(고난당하는 기독교인들에게 기도와 인내할 것을 권면), 금요일 이사야 59장(죄 지은 백성이 회개할 때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신다는 예언), 그리고 토요일에는 로마서 8장(성령이 주시는 생명, '장차 나타날 영광에 비하면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고통은 아무것도 아니다') 등이었다(이날 읽은 본문은 이사야 10장이었다. - 편집자 주). 여기서 민족 운동을, 신앙고백 위에서, 신앙 운동과 함께 진행시킨, 민족과 신앙을 일치시킨 선인들을 엿보게 된다.
5. 결론
끝으로 3·1운동에 참여한 기독교 민족 운동의 성격과 3·1운동에 기독교인이 차지하는 위치 등을 지적하면서 이 글을 맺겠다.
3·1운동이 기독교 신앙과 민족적 양심의 결합에서 나왔다고 할 때 기독교인의 민족의식의 성격은, 기독교 신앙이 정의·자유·평화에 기반한 하나님나라의 건설과 확대에 둘 수 있다면, 민족적 양심은 자주·평등·해방을 목표로 한 독립 국가·민족자결주의 건설에 있었다. 이 두 가지가 결합되는 접점에 3·1운동에 참여한 한국 기독교인들의 '민족주의 신앙'이 서 있다.
기독교인들의 3·1운동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3·1운동의 선도·참여·지지·비지지 계층 가운데, 주로 선도 계층에 서 있고, 참여·지지 계층에 광범위하게 서 있음을 알 수 있다.
3·1운동은 민족 운동이면서 인류 양심의 회복 인류의 공동선(共同善)을 추구한 운동이었다. 당시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한민족을 핍박한 일제에 대한 항거이자, 폐쇄적 민족주의를 극복하고 인류의 보편적 진리에 접근하려는 운동이기도 했다. 그런데 현재 한국은 제3세계에 대해, 일본이 당시 우리에게 갖고 있던 위치에 서 있다. 특히 이 시점에서 우리는 이 땅에 와 있는 외국인 근로자와 제3세계에 대해 일본이 과거에 우리에게 취했던 자세를 갖고 있지 않은지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3·1운동은 또 당시 남녀·연령·종교와 이념·지역을 초월한 일치된 정신으로 민족독립을 쟁취하려고 하였다. 이같은 정신은 50여 년 이상 세계에서 유일하게 분단 민족으로 남아 있는 조국에 그 평화 통일의 토대를 구축하는 정신적 기저로서 활용해야 할 것이다.
3·1운동 96주년을 맞아, 교회와 민족을 하나님 앞에서 다시 생각하는 우리는, 다윗이 골리앗을 향해 외쳤던 말씀을 상기하면서, 민족의 문제를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겸손히 그 분의 뜻을 살펴보자.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붙이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머리를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로 오늘날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숭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로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붙이시리라(삼상 17장 45~47절)." 이 확실한 믿음 위에서 민족 운동을 수행한 선조들의 신앙과 애국심에 기쁘게 동참하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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