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은 사회적 동물로서 정치적인 것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다. | 사실 넓은 의미에서 본다면 인간이 만들어내는 모든 이론과 행동은 | 모두 정치적인 것 이라 할 수 있다. 그 고상한 플라톤 철학은 귀족 | 정치가 그 지향점이며, 그 어렵다던 칸트도 결국 계몽이라는 시대적 | 산물이자 동시에 그것의 제시였다. 가장 비정치적이라는 과학도 결국 | 은 명제의 제시와 증명이라는 틀로 인해 정치적 입장으로부터 결코 | 자유로울 수 없는 것이다. 심지어는 캘빈의 정교분리도 하나의 정치 | 적 입장일 수 밖에 없었다. 어쩌면 캘빈이야말로 이러한 정치적 입장 | 을 지닌 채, 제 마음껏 정치력을 행사하였던 몇 안 되는 정치적 개혁 | 가라고 필자는 단정하고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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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와 목회자, 평신도 역시 정치적 입장을 지닐 수밖에 없고 실제적으로든, 아니면 어떤 모양으로 위장을 |
하더라도 정치적 입장을 지니고 있다 하겠다. 이러한 목사들의 정치적 태도를 목회자들 사이에 떠도는 농담을 |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분류해본다. 1) 위하‘여' 2) 위하‘야' 3) 위하‘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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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위하‘여’부터 설명을 드리자면, 아시다시피 노골적으로 혹은 여러 가지 신학적 인용이나 성경의 오도를 |
활용하여 가진 자의 편을 드는 교회와 목회자들이 있다. 이런 태도라는 것이 이제는 예수 믿지 않는 보통 |
사람들에게마저 그 속심이 너무나 훤히 노출되었는지라 독자 제현들에게 더 이상 설명할 필요가 없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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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는 위하‘야’라는 것이다. 사실 이 정치적 태도는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많은 분들이 빠지기 쉬운 유혹 |
이지 않느냐 싶다. 왜냐하면 이 태도와 이 태도의 시작은 본인의 정치적 욕망 때문에 추동되기 보다는, |
무엇인가 이룩하려는 현실적인 운동 논리 때문이기에 더욱 그러하다. 즉 현재의 잘못된 현실을 타파하기 |
위해서는 현실적인 대안 세력과의 합종연횡이 바로 하나님 나라를 위한 행군이라는 확신 때문인 것이다. |
위하‘야'라는 정치적 입장이 최선의 방법이 아닌 것은 분명하지마는, 차선 혹은 차악으로서라도 악의 세력을 |
제거하려는 선량한 의지가 위하‘야'를 택하는 분들의 기본적인 동인이라는 논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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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이런 분들의 ‘쉬운’ 태도를 용인할 수가 없다. 결국 예수는 ‘해결을 통한 완성’보다는, |
‘완성을 위한 과정'을 보다 중요시 여겼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예수가 예수의 길을 걷는 우리에게 |
제시하는 것은, 기본적으로 현실적인 판단이 아니라 그것의 도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는 광야에서 |
시험을 받으셨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고, 그리고 최종적으로 부활 후에 갈릴리로 향하셨던 것이다. |
하나님 나라는 어떤 최종으로서 지향점인과 동시에 이미 여기라는 바로 오늘인 것이다. 그러므로 위하‘예'는 |
이미 여기에 하나님 나라가 존재하지 않으면 그것은 존재이유가 불가능한 것이다. |
즉 위하‘예'라는 정치적 태도에 있어서 현실은 끝이 도상에서 온전히 드러나는 의미에서의 현실이다. |
현실이 어떤 판단이나 고려의 대상 아니라, 마지막이 오늘에 드러남으로서 그 마지막의 온전함을 보여주는 |
정치적 행위로서 종교적으로의 돌입이라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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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교회의 사회적 영향력이 현저히 줄어드는 가운데 과거와 달리 기독교 사회운동, 평화통일운동이 |
약화된 것은 누구의 탓도 아니다. 바로 하나님 나라의 동력을 예수의 현실이 아닌 정치적 현실이라는 잘못된 |
현실 개념에 흔쾌히 동의하여 예수의 현실을 잃어버린 바로 우리 탓이기 때문이다. 거리에서 구호로 부르짖는 |
일부 보수적인 대형교회 교인들과 목회자들의 반북, 통일 관련 집회와 기도회 그리고 복음선교를 내세운 |
선교단체들의 일방적 대북풍선 띠우기, 시민사회 단체들의 통일운동에 대한 일방적 좌파 매도 논리 등은 |
교회의 진정성을 의심 받게 하고 있다. 예수운동은 틀어 주기 위해서가 아니라 놓아주기 위해서 존재한다. |
끝을 얻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끝으로 걷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위하‘예'가 지니고 있는 |
정치적 태도인 것이다. 상대를 굴복시키려는 종교파시즘적 통일운동이 아닌 진정한 '화해'와 '공존'을 과정 |
속에서 고민하는 교회의 평화통일운동만이 민족의 화해와 통일을 실현하고 싶어하는 교회의 참모습에 대한 |
국민적 공감대를 만들어낼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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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통일운동, 사회변혁적 운동에 참여하는 이 시대 교회와 신앙인들의 정치적 입장은 무엇일까? |
보수교회, 일부 대형교회들의 종교파시즘적 통일운동과 선교 활동이 난무하고, 심지어 평화통일 운동을 |
지향하는 기독교 단체들과 개인들 속에 자신과 자신이 속한 단체의 '위상','입지'를 과도하게 내세우는 |
모습들을 보며 2000년 전에 이 땅에 오셨던 예수의 행적을 우리의 행적과 꼼꼼히 비교 묵상하면서, |
스스로가 응답을 해야 하지 않을 까 싶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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