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경민 ] 평통기연, 한국교회의 평화통일에 대한 담론형성이 가능할까?


 
평화통일을 위한 기독인 연대(이하 평통기연)는 한국교회의 평화통일 담론을 이끌어 내고
이것을 한국교회와 나누어서 민족의 평화통일에너지를 창출하는데 기여하자는 목적으로
지난해 10월에 창립되었다.
 
한국교회가 이 땅에 평화통일을 이루어내는 것은 예수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는 일의 일환이다.
예수님의 지상명령(마28:18-20)은 “영혼구원하여 제자 삼으라” 는 것이다.
흔히 영혼구원만을 지상명령의 성취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것은 큰 오해이다.
영혼구원 후에는 반드시 제자로 양육하는(만드는) 사역이 계속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다 지켜 행하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겐 미완의 사역이 될 수밖에 없지만 그 길을 향해 쉼 없이 분투해야 하는 삶이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어찌 평화를 파괴하는 일에 가담할 수 있겠는가?
 
평화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불사하는 경우가 없을 수 없겠지만 역사적 경험으로 보면
대부분 전쟁은 자기 탐욕을 성취시키는 수단이었뿐 평화를 지키기 위한 전쟁은 극히 드물었다.
필자는 어떤 경우에도 전쟁은 안된다는 절대평화론자는 아니다.
예컨대 북한이 적화통일을 위해 전면전을 시도할 때 우리가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작금의 한반도 상황은 설령 남북간에 전면전이 발생할 경우에도
누가 먼저 총을 쐈느냐보다, 남한이 전쟁예방을 위해 무엇을 했느냐가 더 중요한
질문이 될 것이다. 왜냐하면 남북한의 국가적 역량이 너무나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은 우리 민족의 미래를 책임져야 할 위치에 이미 도달해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성경적 제자도를 통해 이와 같은 대한민국의 민족사적 사명을 일깨워야 한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그동안 진보와 보수로 나뉘어져서
평화적 통일담론을 형성하는 일에 거의 기여하지 못했다.
세속적 차원의 이데올로기 갈등을 교회가 극복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한국교회는 지금 진보와 보수의 갈등 때문에 스스로 가누지 못할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진보와 보수의 연합이 가능할까?
우리는 시작부터 그 일이 쉽지 않음을 각오했다.
예컨대 한국사회에서 대표적인 합리적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고 크리스챤으로서
기독교사회책임운동등 다양한 기독운동에도 큰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박세일교수와의 평화통일담론 토의가 가능할까?
스스로 이런 질문을 던질 때면 가슴이 답답해 온다.
 
박세일교수는 여러 지면을 통해 북한의 변화를 위해 북한 주민을 깨우는 일을
지속적으로 전개해야 한다고 말한다.
지금까지 북한지도자들을 대화상대로 여겨온 대북화해정책이 실패했기 때문이란다.
북한주민을 직접 상대해야 한다는 말은 북한 주민을 의식화 시켜서
김정일정권에 저항케 해야 한다는 말인가?
 
‘민주주의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박세일교수의 주장은 일견 타당성이 있다.
그러나 북한의 현실을 정확히 인지하고 하는 말인지 묻고 싶다.
예컨대 1960년 독재정권에 항의했던 4.19때는 약 200명이 희생됐다.
그 후 20년이 지난 1980년 광주 5.18 민주항쟁때는 약 300명이 희생됐다.
1960년대 대한민국의 정치체제하에서는 정권에 반항했던 사람들 200명이 죽으니까
정권자체가 감당을 못하고 무너진 것이다.
그런데 그 후 무려 20년이나 흐른 후 광주에서 독재에 항거하다 300명이 죽었는데
왜 전두환정권은 7년이나 버틸 수 있었을까? 뿐만 아니라 300명의 죽음에 대해
책임지의 주체는 아무도 없이 지금도 그 때 그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할까?
그것은 한마디로 모든 역사적 가치를 빨아드려 버리는 <지역패권주의>라는
블렉홀이 지금도 우리 사회에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우리사회는 김대중, 노무현시대를 거치면서 그 무서운 블랙홀을 연상화 시키는
추동력이 생겼으니 천만다행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북한은 어떤가?
북한사회의 비정상적 특수성에 관해 지금 여기서 깊이 있게 논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약관화한 실체적 진실이 있다.
북한 주민들이 의식화 되고 그들이 민중적 저항운동을 시작한다면
북한에서 몇 명이나 죽을까?
매우 상징적 숫자이지만 인구의 절반인 1,000만은 죽을 것이다.
그래야만 북한 정권이 무너질 것이다.
1,000만이 아니고 1,00만이라 하자, 100만이 아니고 10만이라고 하자.
북한정권의 민주화과정에서 10만이 총탄에 쓰러지는 것을 기대하고 있는가?
 
한국의 보수주의는 그토록 잔인한가? 그렇지 않으면 상황판단능력이 그토록 유치한가?
7,000만 겨레가 상생할 수 있는 길이 과연 없다는 말인가?
보수와의 대화는 이런 답답한 현실을 뛰어 넘는 지혜와 인내와 겸손이 요구된다.
진보인지, 보수인지, 중도인지 자신의 이념적 성향에 관해
명확한 정체성도 확립하지 못한 나 같은 사람이 박세일교수정도의
합리적 보수와 대화가 가능할까?
박세일교수와의 대화도 어렵다면 근본적 보수 혹은 극단적 보수와의 대화는 어떠할까?
필자의 생각으로는 거의 대화가 불가능할 할뿐만 아니라
이런 대화를 통해 평화통일담론을 이끌어 내려는 시도자체가 매우 소모적인 일로
여겨지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임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그렇다면 왜, 평통기연운동에 헌신하려 하는가?
나의 생각은 간단하다.
평통기연이 하고자 하는 일이 주님의 뜻이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할 만한 일, 가능한 일을 선택해야지
생의 에너지를 낭비해도 되느냐? 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대답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평통기연운동이 주님의 뜻이 아니라는
명백한 계시를 받을 때까지
저는 이 일을 위해 기도하고 이 일을 위해 헌신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