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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굶주림과 강추위에 극심하게 고통당하는 아이들의 아픔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
대북정책을 결정하는 이들 중에는 신앙인들이 많을 터인데 공감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은 |
우리의 신앙이 과연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말씀에 근거하고 있는가 의심하게 되는 증거는 아닐런지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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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종교학자 케렌 암스트롱은 그녀의 책 “마음의 진보’에서 |
모든 종교는 공감의 중요성을 역설하고 있다고 전하며 그것은 “공감을 통하여 남의 아픔과 |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라고 지적합니다. 또 “공감은 깨달음에 이르는 가장 안전하고 확실한 길이다.”라고 |
말합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타인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한다는 것은 신앙인으로서 |
바로 서있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라고 볼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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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9:35-38에 예수사역의 본질이 나옵니다. |
가르치고 선포하고 고치시는 삼중사역의 동기를 말해주는 것은 “불쌍히 여기셨다.”는 단어입니다. |
‘불쌍히 여기셨다는 단어는 목자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해 있는 민중들의 고통에 주님께서 |
깊이 공감하셨다는 말입니다. 그들의 고통을 자신의 고통으로 받아들이셨기에, |
애간장이 끊어지는 아픔으로 그들에게 복음을 선포하시고 진리를 가르치시고 병을 치유하실 수밖에 |
없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공감의 힘으로 하나님나라 사역을 감당하시며,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셨습니다. |
우리가 공감하는 능력을 키우지 못하면 공감의 대가이신 예수님을 따르는 |
올바른 신앙인이 될 수 없다는 점에서, 마음이 무디어진 우리 자신을 돌이켜보며 회개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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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진 추위 속에서 굶주리며 떨고 있는 북한의 아이들이 내 자식이라고 생각한다면 |
어떻게 내복을 보내주자는 호소에 귀를 막을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알고 나서 이웃의 고통에 |
민감해져서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다면 그보다 더 귀한 변화는 없습니다. |
제발 아픔에 함께하는 공감의 힘이 널리 퍼져서 우리 사회에 공동체적인 연대감이 확산되고, |
남북한의 관계가 따뜻하게 진보하는 귀한 역사가 있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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