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경임] 평화, 용서와 공존의 고통을 넘어서야 지켜지는 실재


정문립설 이라는 고사성어가 있습니다.. 생각에 잠긴 스승을 제자는 눈이 한자나 쌓이도록 말없이
바라보고 서 기다렸다는 것입니다.
그 이야기를 여러 가지 각도로 해석할 수 있겠지만 인간이 동물이 아니고 인격과 이성을 지닌 존재이기에
지극한 존경을 담은 행위를 할 수 있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을 것입니다.
배움이란 과거의 그릇됨을 넘어서 더 나은 인간의 삶을 생각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고
인류는 다양한 형식의 교육의 특권을 통해 자신의 야만을 벗어나 사회적인 규칙을 만들고 지켜나가려
노력하며 문화와 문명을 이루어 온 것이 아니겠습니까!
 
특별히 스승과 제자의 이야기로 인간 역사 안에서 의미 있게 회자되는 이야기를 고르라면
독배를 마시면서 제자 플라톤에게 인간의 이성적인 삶을 가르친 소크라테스에 관한 일화와
그리고 지난 이천년 이상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알고 있는 베드로와 그의 스승 예수의 이야기가
있을 것입니다.
죽음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인 스승을 바라보며 깊어져간 플라톤의 고뇌는 서양사상사에
지대한 공헌을 했다면 처형당하는 스승을 부인하던 비겁함을 딛고 예수의 삶을 전하기 시작한
베드로의 선교적 헌신은 서구의 기독교문명을 가능케 한 기반이 되었다고 할 것입니다.
두 이야기 모두 동물과는 달리 스승을 모시는 것이 가능한 인간이기에 이어져온 사실입니다.
이러한 특별한 위인들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자신의 평생을 걸쳐 귀감이 되는
특별한 스승이 있는 것은 참으로 행복한 일 일 것입니다.
급변하는 세대에 날이 갈수록 혼란스러운 가치관에 부딪히며 늘 부족한 자기 자신 때문에
힘들어하는 사람들에게 그런 스승은 인생의 길을 비추는 더할 나위 없는 빛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올해 부족한 저에게 신학을 가르치시고 목회를 가르치신 스승께서 산수 팔순이 되셨습니다.
요란한 잔치를 마다하시고 선택하신 조촐한 행사는 공산군에게 처형당해 순교하신
부친목사님의 60주년 추모예배와 그간의 고달팠던 여정을 형제분들과 함께
담담히 적어 내려간 문집의 출간이었습니다.
혹여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것도 자랑이 될까 그간 좀처럼 외부에 나타내지 않으셨던 아픔을
이제는 내려놓고 싶으신 것이라 생각 되었습니다.
 
1950년 10월 평양 대동강 강가에서 온몸에 수없이 총탄이 박힌
아버지 목사님의 시신을 건져내서 오열하던 나의 스승은 겨우 18살의 어린 청년이었습니다.
올곧은 신앙으로 일제하에서 신사참배를 거부해 피투성이가 되도록 매 맞으며 저항했던
목사가 겨우 해방이 되어 곳곳에 교회를 개척하며 신앙을 전하는 삶을 살아가는데
찾아온 것은 비참한 최후였던 것입니다.
가난하고 고달픈 목회자 가정의 삶으로 어머니마저 이미 오래전 병으로 잃은 어린 형제들은
새어머니와 함께 기나긴 고통과 외로움의 삶을 남겨 받은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 원망이 누구를 향해 가야하는지 한마을에 살다가 공산당으로 변해
총부리를 들이 덴 이웃인지 평생을 충실했던 종을 버린 것 같은 하나님인지....
그분의 제자로 지낸 지난 30년 가까이 스승은 어떤 언어로도 가르치실 수 없는
신앙의 고뇌를 가르쳐 주셨습니다. 용서가 어떤 고통의 과정을 거쳐 평화를 이루는 씨앗이 되는지를,
그 아픈 여정 없이 모든 기독교인의 스승이신 그리스도를 따를 수 없다는 것을....
 
공산당을 향한 분노와 용서 할 수 없는 대상에 대한 응징이
한국사회 주류의 주장이 되던 시대에 스승은 신학자로 목회자로 평화와 통일을 위해
고뇌하며 애써 왔습니다. 한국교회 대표로 처음 북한 교회대표들을 만나던 날
하필이면 아버지목사님을 처형하게 했던 바로 그 당사자의 아들이
북측 교회 대표로 왔다고 합니다.
아침이면 얼굴을 마주하고 앉아서 평화와 통일을 이야기해야 하는데 ....
밤새 한잠도 못 주무시고 기나긴 기도를 하면서 돌아가신 아버지목사님의 뜻은
무엇일까 생각하시고 또 생각하셨다고 ...
총탄에 맞아 형체조차 알아 볼 수 없었던 아버지의 얼굴이 떠오르는데
아버지목사님의 뜻도 하나님의 뜻도 아닌 당신 자신 안에 분노로 말미암아
용서도 사치스러운 감정처럼 느껴지는 그 밤이 너무도 길고 힘드셨다고....
그러나 평화를 지키는 자가 되는 것이 그리스도의 뜻이고 돌아가신 아버지 목사님의
깊은 신앙이었음을 가슴 아프게 받아들이셨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한교회 대표들과 만나 평화를 이야기 하셨고
또한 동료 목회자분들과 평화통일을 위한 88선언을 기초 하실 수밖에 없으셨노라고 ....
 
북측을 대하는 모든 것에 원칙이 있어야 합니다.
냉정한 판단과 치밀한 계획이 동반되어야 합니다, 힘의 균형을 통해
국제 관계와 자국 내의 여론도 올바른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제자 된 자의 원칙도 돌아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이 땅의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을 배반한 인간을 용서하기 위해 스스로 제물이 되어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이루신 스승인 그리스도의 제자입니다.
그분을 따르는 자로서 분단된 한반도 죽어가는 북측의 주민들과 어린이웃들을 바라보며
어떠한 태도를 취하고 그 이웃을 위한 실천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인가.
어떻게 우리는 분노하는 세상과 다른 그리스도의 평화를 분단된 조국에 이루기 위해
쓰임 받을 수 있는 것일까.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어떤 경우에도 평화를 지켜가기 위해
고수해야 하는 원칙을 남북관계를 바라보며 가지고 있어야 하는 것인가 물어야 하지 않을까요.
 
금강산에서 관광을 간 민간인의 죽음부터 천안함에 연평도에 당사자가 되지 않아도
눈물흘리는 유가족들을 바라보며 분노가 앞섭니다.
무력으로 힘으로 응징하자는 이야기가 당연히 들립니다.
그런데 도무지 스승이신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베풀어주신 용서는 어떻게 배웠는지
생각이 잘 나지 않습니다. 그분이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통해 베푸신
구원의 깊은 가르침을 따르는 그리스도의 제자가 맞는지...
다시 그리스도의 평화를 이 땅에 실현하기 위해 공부해야 하는 가 봅니다.
 
평화를 가능케 한 최고의 존재는 끝없는 용서의 고통을 받아들이신 분이셨다 것을...